“법대로 했습니다.” 이 말에는 자신을 변호하는 뜻만 있지 않습니다. 사적인 감정으로 결정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기준을 따랐다는 설명이 들어 있습니다.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타인의 삶을 바꾸지 못하게 하려면 그 설명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더는 물을 것이 없다는 선언이 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절차를 지켰다는 사실이 그 절차가 충분했는지 묻지 않아도 된다는 허가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어떤 규칙을 적용했는지 설명하는 일과, 그 규칙으로 이 사람을 이렇게 대하는 것이 옳은지 답하는 일은 같지 않습니다. 합법적인 결정은 언제 정의로운 결정이 되는가. 이 질문은 법을 불신하는 사람에게만 속하지 않습니다. 법을 통해 사람을 보호하고 싶기에, 법이 스스로 내리는 평가만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법과 정의의 간격을 개인의 선의로 메우려 해서는 안 됩니다.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야만 보호받을 수 있다면, 보호는 권리보다 호의에 가까워집니다. 누군가의 억울함을 크게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결정한다면, 자신의 사정을 능숙하게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은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 호소의 힘과 권리의 무게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내가 만나지 못한 사람에게도 같은 보호가 돌아가야 한다면, 눈앞의 연민보다 오래 지속되고 넓게 적용될 장치가 필요합니다. 법의 일반성과 절차를 옹호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슷한 사안에 비슷한 기준을 적용하고, 무엇을 증거로 받아들였으며 어떤 이유로 결론에 이르렀는지 다른 사람도 검토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이 있어야 결정권자의 친절이나 분노에 자기 삶을 맡기지 않고도 대우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법이 정의를 제도화한다는 말은 이 의미에서 중요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기준을 세우려면 사람들 사이의 어떤 차이는 판단에 반영하고 다른 차이는 제외해야 합니다.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했는지 따지기 전에, 그렇게 차이를 나누는 것이 정당한지도 물어야 합니다. 같은 규칙이 적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누구에게나 동등한 대우가 돌아갔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자크 데리다는 「법의 힘」에서 법이 권위를 얻고 작동하는 이 지점을 문제 삼습니다. 그가 다루는 법(droit)은 조문에 한정되지 않으며 권리와 제도, 해석과 집행을 함께 가리킵니다. 법은 좋은 생각을 권하는 말과 달리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에게 효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피해를 멈추게 하는 명령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상대방이 따르고 싶은 때만 따른다면 보호의 약속은 쉽게 무력해집니다. 강제력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동시에 권리를 실제로 지키는 데에도 필요합니다. 데리다는 여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 그러한 힘을 행사할 권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묻습니다. 기존 법에 기대어 새 법을 제정할 수는 있지만, 그 기존 법의 권위를 다시 물으면 정당화의 문제는 앞선 자리로 옮겨 갑니다. 법질서를 창설하는 행위는 그 행위로 성립할 질서의 승인을 미리 받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합법인지 판별할 경계 자체를 세우기 때문입니다. 이 행위는 이미 승인된 권위를 행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무엇이 권위 있는 명령인지를 새롭게 정합니다. 이때의 폭력을 모든 법이 유혈사태나 악의에서 태어났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법의 정초를 법 자신의 기준만으로 완전히 보증할 수 없다는 난점입니다. 합법과 불법의 구별을 세우는 행위가 그 구별로 남김없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해서, 성립한 법이 모두 무효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법이 성립하고 집행된다는 사실을 곧 정의의 증명으로 삼을 수 없게 됩니다.
법이 역사적으로 구성되고 해석되는 질서이기에 데리다는 그것이 해체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해체는 법의 전제와 권위가 어떻게 성립했는지 읽으며 다른 해석과 개정의 가능성을 엽니다. 이와 달리 정의를 해체 불가능하다고 부를 때, 그는 비판에서 면제된 완벽한 정의의 공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법이 일반 규칙으로 한 사람을 다루더라도 그의 고유한 처지에 응답해야 한다는 요구는 남습니다. 규칙에 맞게 처리했다는 설명으로 그 요구가 소진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타자는 내가 아는 범주와 설명으로 남김없이 대신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을 뜻합니다. 정의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법과 판단자에게 묻게 합니다. 그 요구를 특정 법률처럼 완성된 내용으로 확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정의는 해체할 수 있는 하나의 제도와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정의의 해체 불가능성을 주장하며 자신의 정의관을 비판에서 제외하는 것은 논의를 거꾸로 이용하는 셈입니다. 정의를 특정한 규칙이나 결정과 동일시할 수 없기에, 그것을 소유했다는 확신도 문제 삼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법 바깥에 흠 없는 정의가 완성되어 있어서 그것을 가져오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권리를 실제로 보장하려면 규칙과 제도를 세우고 집행해야 합니다. 법과 정의의 간격은 법을 떠나면 사라지는 문제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려는 법의 실천 안에서 거듭 마주치는 난점입니다.
이 간격이 한 사람의 삶에 닿으면 법이 무엇을 들을 수 있는지가 중요해집니다. 법은 사람을 신청인이나 피고인, 피해자와 같은 지위로 부릅니다. 그 이름은 권리를 부여하고 판단의 범위를 분명히 하는 데 필요하지만, 그가 겪은 시간을 모두 담지는 못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자신의 사정을 법적 언어로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말할 만한 사정이 없다는 판단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서툰 호소라는 이유만으로 사실 확인을 면제해 줄 수도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을 말할 기회를 주었고 무엇을 확인했는지 살피는 일입니다. 자료를 준비하거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데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면, 그 부담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절차의 존재만 알려 주는 것으로 충분할까요. 이때 문제는 담당자의 친절 여부를 넘어섭니다. 어떤 사정이 애초에 판단 자료로 들어올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개인에게만 설명 책임을 지우면, 제도가 듣기 어려워하는 말을 개인이 하지 못한 탓으로 돌릴 수도 있습니다. 판단에 들어온 자료를 공정하게 다루는 일에서, 필요한 자료가 들어올 조건을 마련하는 일로 책임의 범위가 넓어집니다. 같은 절차를 거쳤다는 설명 뒤에도, 자신의 처지를 설명할 수 있는 조건이 같았는지는 남아 있습니다.
한 사람을 제대로 대하려는 요구는 규칙을 건너뛰는 지름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눈앞의 사람에게만 예외를 허용한다면 같은 처지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다른 사람에게 부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데리다가 아포리아(aporia)라고 부르는 난점은 여기서 선명해집니다. 정의로운 판단은 규칙을 따르면서도 그 규칙이 이번 사건에 적합한지 다시 해석하고 승인해야 합니다. 앞선 결정을 복제하는 것과 이번 사건을 검토한 끝에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은 다릅니다. 누가 같은 경우에 해당하는지, 어떤 차이를 중요하게 볼 것인지 정하는 일부터 이미 해석입니다. 판단은 기존 규칙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이번 사건에서 그 의미와 적용의 정당성을 새롭게 세웁니다. 여기서 새로움은 매번 다른 법률을 만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규칙이 정답을 보장한다는 확신을 유보하고, 이번 사안에서 왜 그 규칙을 다시 승인할 수 있는지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법을 보존하면서 다시 정당화해야 하는 이중의 요구는 규칙을 읽는 성실성만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데리다의 결정 불가능성 역시 조사할 자료가 부족해서 머뭇거리는 상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규칙과 근거를 충분히 검토해도 그것들이 결단을 대신할 수 없다는 난점입니다. 빠진 사실은 더 조사해야 하지만, 확보한 사실에 어떤 무게를 부여하고 서로 다른 요구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지는 여전히 판단의 몫입니다. 법을 따라야 한다는 요구와 이번 사건의 고유성에 응답해야 한다는 요구 가운데 어느 쪽도 지울 수 없기에, 결정 불가능성은 결정을 내린 뒤에도 그 결정을 따라옵니다. 선택하지 않은 해석과 감당시키기로 한 부담이 남는 것입니다. 충분히 숙고했다는 사실은 그 선택이 남김없이 정의롭다는 확신까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판단자의 주관을 막을 방법도 없어지는 것 아닐까요. 자신의 직감을 정의라고 믿는 사람이 기존 기준을 흔들 때, 그 비용은 결정권이 없는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 우려를 경직된 법 이해로 밀어낼 수는 없습니다. 데리다의 논의를 현실의 판단으로 옮기려면 불확실성의 인정과 자의의 허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완전한 보증이 없다는 것은 더 나은 이유와 더 나쁜 이유를 가릴 수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확인할 사실을 확인했는지, 다른 당사자의 권리를 검토했는지, 다르게 대우했다면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물을 수 있습니다.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사람도 그 질문에서 면제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유를 공개하는 일과 그 이유가 충분하다고 인정받는 일은 다릅니다. 설명은 다른 사람이 판단의 근거를 검토할 자리를 열어 줍니다. 근거를 제시했다는 사실로 그 근거에 대한 비판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부담을 감수하게 된 사람이 왜 그 정도의 부담을 자신에게 지웠는지 묻는다면, 결정권자가 자기 기준에 충실했다고 되풀이하는 것으로는 답이 되지 않습니다. 설명의 충실성까지 갖추었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그 설명이 전제한 기준은 이의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공개적인 이유 제시는 자의를 견제하는 데 필요하면서도 정의로운 결정의 충분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데리다의 사유가 더 정당한 형벌이나 지원 기준을 골라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비교에는 사안의 사실과 충돌하는 권리, 제도가 낳을 결과에 관한 별도의 논증이 필요합니다. 해체는 이 수고를 대신하거나 어떤 선택도 괜찮다고 승인하지 않습니다.
그 논증을 계속하는 동안에도 결정의 시간은 흐릅니다. 판단하는 사람은 더 알아야 한다고 느끼고, 판단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 사이의 삶을 감당합니다. 아직 보호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검토의 연장은 그에게 위험에 계속 노출되어 있으라는 요구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서둘러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한다면 그 성급함의 비용을 그 사람이 떠안습니다. 데리다가 붙드는 것은 정의가 모든 지식이 갖추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결정해야 하지만, 그 결정에는 완전한 보증이 없습니다. 더 많은 정보가 위험을 줄일 수는 있어도 결단의 책임 전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하지 않는 일조차 현재의 상태를 지속시킨다는 점에서 결과를 낳습니다. 이때의 결단을 용감한 지도자의 고독으로 낭만화해서는 안 됩니다. 판단자가 괴로워했다는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지운 부담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결정권자의 불안보다 그 결정에 의해 살아갈 사람의 시간이 더 절박할 수 있습니다. 책임을 감당한다는 말은 마음속 괴로움의 크기보다 무엇을 검토하고 무엇을 남겨 두었으며 그 결과를 누가 감당하게 되었는지에 닿아야 합니다. 결정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나중의 판결로도 돌려받을 수 없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보증 없는 결정 앞에서 데리다는 ‘도래할 정의’를 말합니다. 도래(à venir)는 미래의 어느 날 완벽한 법체계가 출현하리라는 예고가 아닙니다. 현재의 질서가 미리 예상하고 분류할 수 없는 타자와 사건에 열려 있음을 뜻합니다. 이 요구를 새로운 자료가 생기면 결론을 고치라는 말로만 이해하면 중요한 지점을 놓칩니다. 어떤 사람의 경험은 기존 기준에 넣어야 할 자료이기 전에, 무엇을 권리와 피해로 인정할지 정한 기준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제도가 한 사람의 호소를 피해로 읽지 못한다면, 문제는 그가 증거를 덜 냈다는 데만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현재의 기준이 그 경험을 피해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사실을 더 충실하게 밝혀도 그 요구는 심사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 자료를 더 받거나 예외 하나를 허용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법이 보호할 사람과 보호할 일을 나누어 온 방식을 다시 물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새롭게 제기된 요구가 그 자체로 옳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기존 범주에 없다는 이유를 그 요구를 검토하지 않을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데리다가 계산할 수 없는 정의를 말하면서도 계산을 요구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때 계산은 숫자를 다루는 일만이 아니라, 사정을 비교하고 권리와 부담을 배분하는 판단까지 포함합니다. 기존 경계를 문제 삼으면서 어떤 권리를 어떻게 보장하고 누구에게 어떤 부담을 나눌지 다시 결정해야 합니다. 법 밖의 순수한 양심으로 물러나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도래는 더 많은 사례를 처리하도록 같은 체계를 넓혀 가는 진보의 다른 이름이 아닙니다. 충분히 공정하다고 여긴 체계가 무엇을 공정성의 문제로조차 받아들이지 않았는지 묻게 합니다.
다시 “법대로 했습니다”라는 말 앞에 섭니다. 이 말은 버릴 말이 아닙니다. 결정을 사적인 호오에 맡기지 않았다는 설명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다만 그 설명 다음에도 왜 그 규칙으로 이 사람을 이렇게 대했는지 답할 자리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모든 판결을 끝없이 뒤집거나 모든 처분을 무기한 유보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결정을 마무리할 필요와 그 결정에 대한 비판을 끝낼 권한은 다릅니다. 법을 집행한 사람이 일을 마친 뒤에도 당사자는 그 결과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가 건네는 이의는 이미 끝난 판단을 방해하는 말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것까지 다시 묻는 말일 수 있습니다. 판결의 마지막 문장을 쓴 뒤에도, 그 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답해야 할 책임은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