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5장은 찬송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익숙함과 함께 맡겨지는 자리 사이의 긴장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찬송하는 사람들을 “여호와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오랜 배움과 훈련을 통해 찬송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스승과 제자를 포함한 사람들이 함께 제비를 뽑아 직임을 받습니다. 이미 배워 익숙한 사람에게 함께 맡겨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언가를 오래 배우고 익히는 일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과정입니다. 교회 안의 섬김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배우는 시간, 기도를 익히는 시간, 다른 사람을 섬기는 법을 알아가는 시간은 공동체를 세우는 중요한 토대가 됩니다. 경험은 가볍게 여길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빚어 가시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열매일 수 있습니다.

역대상 25장의 찬송하는 사람들도 그러했습니다. 다윗은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들을 세워 찬송의 일을 맡겼고, 그 가운데 여호와를 찬송하기를 배워 익숙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찬송은 단순한 재능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준비된 섬김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는 마음뿐 아니라 배움과 훈련도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익숙함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배를 이끌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8절은 스승과 제자, 큰 자와 작은 자를 막론하고 모두가 제비를 뽑아 직임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함께 있습니다. 먼저 배움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합니다. 스승과 제자는 같은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서는 일을 막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배운다는 것을 어느 순간 끝나는 과정처럼 생각합니다. 충분히 알게 되면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고, 익숙해지면 다시 배울 이유가 없다고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대상 25장은 익숙함과 배움이 서로 반대가 아님을 보여 줍니다. 잘 배운 사람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맡겨지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숙련의 의미가 다시 보입니다. 잘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배움을 없애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잘 배웠기 때문에 더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이 익힌 것을 설명하고 나누는 일은 공동체를 세우는 섬김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이 익숙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방식만이 옳다고 여기기 시작하면, 배움은 어느 순간 다른 사람의 배움을 막는 벽이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경험 있는 사람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공동체는 검증된 배움과 책임 있는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먼저 배운 사람은 자신이 받은 것을 성실하게 전해야 합니다. 동시에 자신이 가진 경험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 일하시는 가능성을 닫아 버리지 않도록 살펴야 합니다. 배움은 자신을 높이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함께 나누는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자리에서도 비슷한 질문이 필요합니다. 경험 있는 사람이 자신의 방식을 설명하고, 왜 그렇게 해 왔는지 함께 살피며 다른 사람의 질문과 판단을 받아들이는 것은 책임 있는 섬김입니다. 반대로 자신이 오래 해 왔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결정을 맡아 버리거나, 다른 사람이 배울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숙련이 감당해야 할 책임과는 다릅니다. 또한 배우는 사람도 아직 부족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몫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맡겨진 자리에서 성실히 감당하며 필요한 도움을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배우는 공동체는 경험 있는 사람의 책임과 배우는 사람의 책임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역대상 25장의 24반차 배치는 한 사람이 찬송 전체를 독점하는 모습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맡겨진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세워지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것은 모든 차이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같은 수준의 준비를 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배움과 역할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함께 세워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 모습은 우리가 가진 경험을 다시 바라보게 합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내가 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더 책임 있게 사용하라는 부르심일까요. 익숙함은 사람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이유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더 깊이 섬기게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은 이러한 삶의 방향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먼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생명을 말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증명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받은 생명과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서로를 대하는 삶을 권면하면서 먼저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그리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서로를 대하며,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더 가진 사람에게 무조건 자리를 내어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만 인정받는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 받은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생명은 우리의 가치를 우리가 가진 능력이나 역할에만 묶어 두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잘하는 일을 책임 있게 감당하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교정받는 일이 곧 내가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 아닌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가치는 완벽하게 해내는 능력에서 나오지 않고, 먼저 사랑받은 존재라는 사실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함을 인정하면서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받은 배움을 더 온전히 사용하기 위해 계속 배울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공동체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성도들은 서로 가르치고 권면하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양하는 삶으로 부름받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따라오는 구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은혜가 서로를 향한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역대상 25장의 스승과 제자도 그러한 긴장 속에 있습니다. 제자는 단순히 미래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은 그들도 함께 제비를 뽑아 직임을 받은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배우는 과정과 맡겨진 책임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배우면서 섬기고, 섬기면서 다시 배웁니다.

손에 익은 일은 귀합니다. 오랜 시간 반복하며 익힌 섬김에는 하나님께서 지나오게 하신 시간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익숙함이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 안에서 사용될 때, 그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힘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는 섬김이 됩니다. 배움은 사람을 높이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 받은 것을 함께 나누는 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배움의 시간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먼저 배운 사람은 받은 것을 책임 있게 나누도록 부름받고, 배우는 사람은 맡겨진 자리에서 성실히 섬기며 계속 자라도록 부름받습니다. 이 모든 과정의 시작과 중심에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받은 생명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 은혜 안에서 우리는 함께 배우고, 함께 가르치며,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