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6장에는 하나님께 재물을 드린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다윗과 여러 지도자들에 이어 사무엘과 사울, 아브넬과 요압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단은 봉헌자의 이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별하여 드린 물건이 슬로못과 그의 형제들의 관리 아래 있었다는 기록이 뒤따릅니다(26:26–28).

누가 드렸는지를 읽던 시선이 누가 맡았는지로 옮겨 갑니다. 드린 사람의 정성과 희생을 귀하게 여기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헌신을 받아 다루는 공동체의 책임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드렸다는 고백은 그 뒤의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그 고백이 재물의 사용과 사람을 대하는 판단에까지 이어지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본문은 성전의 곳간과 구별하여 드린 성물을 보관하는 곳간을 언급하고, 이를 맡은 레위인들을 기록합니다. 성물에는 전쟁에서 얻은 물건 가운데 따로 드린 것도 있으며, 여호와의 전을 위한 목적이 명시되어 있습니다(26:20–27). 봉헌을 기록했다는 사실이 그 물건을 얻기까지 있었던 모든 행위를 승인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재물에 정해진 목적이 있고 그것을 맡은 사람이 있다는 관계입니다. 현대의 교회 재정을 이 곳간과 그대로 같다고 할 수는 없어도, 담당자가 관리할 권한을 가졌다고 해서 재물의 목적까지 자기 뜻에 종속시킬 수 있는지 묻게 됩니다. 드리는 마음이 아무리 진실해도, 그 마음만으로 이후의 쓰임이 저절로 보장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역대상 29장의 다윗의 기도는 이 재물의 근원을 밝힙니다. 다윗은 자신과 백성이 드릴 수 있었던 것부터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전을 위해 마련한 물건들도 여전히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29:14–16). 우리의 헌신에 앞서 하나님의 주심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다시 드린다는 고백은 수고의 가치를 없애지 않습니다. 다만 드린 사람도 그것을 맡은 사람도 자신의 기여를 내세워 재물의 쓰임을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곳간을 맡은 사람들의 이름 뒤에는 다른 직무가 이어집니다. 그나냐와 그의 아들들은 성전 밖에서 이스라엘의 일을 맡은 관원과 재판관으로 등장합니다. 하사뱌와 그의 동족은 요단 서쪽에서, 여리야와 그의 형제들은 요단 동쪽의 지파들을 관할하며 하나님에 관계된 일과 왕에 관계된 일을 맡습니다(26:29–32). 레위인의 책임은 성소 가까이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재물을 보관하는 책임 곁에 백성의 공적 업무를 다루는 책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이 왕의 모든 요구를 하나님의 뜻으로 바꾸어 주지는 않습니다. 서로 구별되는 직무들을 맡은 사람들이 각 지역에서 무엇을 담당하는지 밝히는 것입니다.

이 배열을 따라 읽으면, 하나님께 드리는 마음만 귀하게 여기고 재물의 사용이나 공적 판단은 사소하게 취급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재물이 어디에 쓰이는지, 어떤 기준으로 일이 결정되는지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맡아 온 일일수록 이 책임은 복잡한 감정과 만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정을 알고, 반복해서 생기는 어려움을 견디며, 남들이 돌아간 뒤에도 남은 일을 처리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깊다면 누군가 결정의 이유를 물을 때 자신의 수고 전체를 의심받는 듯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일에 관한 질문이 자신이 이 공동체에 필요한 사람인지 묻는 말처럼 들리는 경우입니다. 그 서운함을 곧바로 교만이라 부를 수는 없습니다. 수고를 알아주지 않은 채 설명만 요구하는 공동체 역시 자기 태도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서운함 때문에 질문을 닫아 버린다면, 결정의 영향을 받는 사람은 자신에게 중요한 일을 이해할 기회마저 잃습니다.

내가 애썼다는 사실과 이번 판단이 타당하다는 사실은 서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맡은 일을 내 것으로 여기면서, 선한 의도로 일했으니 내 판단은 묻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게 됩니다.

그렇다고 절차를 늘리는 것만으로 신뢰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이미 부정을 저질렀다고 단정한 채 담당자를 몰아붙이거나, 사소한 판단까지 허락받게 만든다면 책임을 확인한다는 말이 다른 통제의 수단이 됩니다. 일을 맡겨 놓고 판단할 여지는 주지 않는 태도도 사람을 소모시킵니다. 필요한 것은 누구도 믿지 않는 분위기가 아니라, 무엇을 맡겼고 어느 범위에서 판단할 수 있는지 서로 아는 질서입니다. 그 범위 안에서는 일할 수 있게 하고, 함께 확인할 사안에서는 기준과 이유를 나누는 것입니다. 설명의 책임을 담당자에게만 요구하면서 정작 일을 맡긴 사람의 결정은 누구도 묻지 못하게 한다면, 그 질서는 이미 공정함을 잃은 셈입니다.

책임을 나누는 일은 맡은 사람도 보호합니다. 중요한 사정이 한 사람의 기억에만 남아 있다면, 다른 사람은 일에 참여하기 어렵고 담당자는 자리를 비우기 어려워집니다. 사용 내역과 결정의 이유를 함께 아는 일은 다음 사람이 일을 이어받을 수 있게 합니다. 역대상의 여러 담당자를 오늘의 직제와 맞출 수는 없지만, 그 목록을 읽고 한 사람에게 끝없는 헌신을 요구하는 쪽으로 나아갈 이유도 없습니다. 감당할 범위를 나누는 일까지 공동체의 책임에 포함됩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연보를 권할 때 앞세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다는 복음입니다. 부요하신 주님이 그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낮추고 내어주신 은혜가 나눔의 근거가 됩니다(고린도후서 8:9). 교회는 더 많이 내놓아야 비로소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돌보는 공동체입니다. 바울이 다른 사람을 편하게 하려고 고린도 성도들을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밝힌 것도 이 나눔의 방향을 보여 줍니다(8:13–14).

이 은혜는 드릴 사람의 마음에만 관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교회들이 연보의 일을 함께할 동행자를 택했다고 밝히고, 주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선하게 처리하려 한다고 말합니다(8:19–21). 자신의 사도적 권위나 선한 의도만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일을 마치지 않습니다. 그는 연보를 통해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을 실제 처리의 신중함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고백이 사람 앞에서 설명할 책임을 없애지 않고, 그 책임을 감당할 이유가 됩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질문받는 사람의 자리도 바꿉니다. 나를 받아 주신 근거가 그리스도께 있다면, 한 번의 판단을 고치는 일이 내 존재 전체를 무너뜨리는 판결일 필요는 없습니다. 잘못한 일은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으며, 내가 보지 못한 필요를 다른 사람에게 배울 수도 있습니다. 용서받은 사람에게도 바로잡아야 할 일은 남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판단을 정당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함께 확인하는 목적 역시 교회의 평판을 지키는 데만 머물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재물이 실제로 사람을 섬기게 하고, 그 이름 아래 이루어지는 결정이 사람을 함부로 다루지 않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공동체의 요청을 판단할 때에는 가까운 사람의 부탁이라는 이유로 기준을 달리하지 않고, 재물의 용도를 묻는 이에게는 수고의 양을 내세우기보다 결정의 이유를 들려줍니다.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습니다. 들어줄 수 없는 요청에도 이유를 설명하고, 내가 놓친 사정이 없는지 들을 자리는 남길 수 있습니다. 그 앞에 있는 사람을 내 헌신을 평가하는 사람으로만 보면 질문이 부담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이 결정의 결과를 감당해야 할 삶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설명을 나누는 시간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하나님께 드린 것을 맡은 사람으로서 그 이웃을 대하는 시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