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에서는 언어도 말도 하나였다. 이 한 문장만으로 그곳에서 반대자가 침묵을 강요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창세기 11장은 강제노동이나 비판자 처벌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에 독재자의 명령을 써넣으면, 본문을 해석하기도 전에 우리가 비판하려는 공동체의 모습을 완성하게 된다. 그렇다고 바벨의 협력을 아무 문제 없는 결속으로 읽을 수도 없다. 사람들이 함께 원한 일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은 분명히 맞선다(창 11:1–9).
그들이 밝힌 목적은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는 것이었다. 앞서 하나님이 노아와 아들들에게 주신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과 긴장하는 계획이다(창 9:1·7; 11:4).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흩으셨고, 사람들은 도시 건설을 그쳤다. 같은 언어와 공동의 역량이 그 목적의 정당성까지 보장하지는 못했다. 서로 뜻이 맞는다는 것과 그 뜻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는 것은 별개의 판단이다.
교회의 일치를 묻는 자리에서도 판단은 거기서 시작한다. 같은 고백을 입에 올린다는 사실만으로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까지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획일성을 경계한다며 함께 믿는 내용 자체를 없앨 수도 없다. 다른 목소리를 지워 얻는 만장일치와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치는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에는 서로의 말을 듣는 방식과 함께 고백하는 진리가 모두 걸려 있다.
매슈 D. 커크패트릭은 『Modern Theology』에 발표한 바벨 연구에서, 그들의 언어를 다른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집단의 독백으로 읽는다. 같은 말을 주고받아도 다른 사람이 자기 말로 응답할 자리를 잃으면 관계는 닫힌다는 해석이다. 이는 본문에 기록된 정치체제의 설명이 아니라, 언어와 일치의 성격을 묻는 대화적 독해다.
그 독해를 오늘의 공동체에 비추면, 남의 말을 들었다는 것의 의미부터 달라진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낸 뒤 더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데만 사용한다면, 청취는 이미 정해진 결론을 전달하는 기술이 될 수 있다. 대화에는 내가 아직 알지 못한 이유를 그가 말할 수 있다는 인정이 필요하다. 그의 응답이 내 판단에 영향을 미칠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사람이 번갈아 발언해도 실제로 결정하는 목소리는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말에 열려 있다는 것만으로 교회를 설명할 수는 없다. 무엇을 함께 믿으며 그 믿음은 어떻게 판단을 바꾸는가? 오순절의 여러 언어가 무엇을 전하는지 들어야 하는 이유다.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고, 여러 지역에서 온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들었다. 그 자리에서 언어의 차이가 사라졌다는 기록은 없다. 반응도 같지 않았다. 놀라며 묻는 사람들 곁에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행 2:1–13). 이해가 일어났다고 곧바로 만장일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바벨에서는 언어의 혼잡으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고, 오순절에서는 서로 다른 언어 가운데 이해가 일어난다. 두 사건을 이렇게 함께 읽을 수는 있지만, 누가가 오순절을 바벨의 직접적인 성취라고 명시한 것은 아니다. 오순절의 사람들이 하나의 언어로 돌아가지 않고도 하나님의 일을 듣는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높아지심과 성령을 부으심으로 해석한다. 청중에게는 회개와 세례가 요청된다(행 2:22–38). 이어 42절은 새 공동체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고, 떡을 떼며 기도에 힘썼다고 기록한다. 여러 언어는 무엇이든 믿어도 좋다는 선언을 전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함께 받는 복음이 있고, 그 복음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공동의 생활이 있다.
교회가 고백하는 복음의 내용은 함께 탐구한 끝에 비로소 생겨나는 공통분모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일을 전해 받고 믿는 데서 공동체가 시작된다. 이 고백은 서로 알아볼 수 있는 종교적 암호에 그치지 않는다. 누가 교회를 불렀고 누구에게 그 삶이 속하는지를 밝힌다. 같은 복음을 받았기에 서로의 삶을 외면할 수 없으며, 받은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하고 그에 합당하게 살아가려고 함께 배운다. 대화는 그 배움에 필요하지만, 배움의 주인까지 바꾸지는 않는다.
에베소서가 성령의 일치를 지키라고 말하면서 한 주님과 한 믿음, 한 세례를 함께 말하는 이유도 여기서 읽을 수 있다(엡 4:3–6). 성령의 일치는 신자들이 적절한 타협으로 만들어 낼 성과에 앞서 주어진 관계다. 한편 13절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아는 일의 일치를 성장의 목표로 제시한다. 이미 함께 속한 이들이 아직 함께 자라야 한다는 긴장이 있다.
스노드그래스는 이 두 대목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출발점과 신자들이 향하는 목표로 구별한다. 그 구별을 따르면,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셨다는 고백이 현재 교회의 모든 판단을 승인하지는 않는다. 주어진 일치 안에서도 잘못 배운 것을 고치고 덜 자란 관계를 살필 일이 남는다. 성숙이 아직 남았다는 이유로 공통 신앙을 비워 둘 필요도 없다. 성장은 이미 받은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따르는 일이다.
그 방향에서 각 사람의 차이도 자리를 얻는다. 에베소서는 각 사람에게 은혜가 주어졌다고 말하며, 각 지체가 활동하여 몸을 세우는 모습을 그린다. 동시에 속이는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는 성숙을 요구한다(엡 4:7·13–16). 다른 역할과 목소리를 보존하는 일은 모든 주장을 동등하게 참으로 인정하는 일이 아니다. 차이를 가진 사람이 공동의 진리에 비추어 판단하고 기여할 때, 그 차이는 몸의 성장에 참여한다.
이 몸을 이루는 근거는 서로를 참아 내는 능력보다 앞선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적대를 소멸하시고,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다는 것이 에베소서의 설명이다(엡 2:14–18). 이 화해를 받은 사람에게 다른 지체는 내 계획을 수행해야만 함께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나와 함께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다. 그와 맺는 관계를 내 판단에 도움이 되는지로만 헤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가 시작된다. 교회는 복음을 가르치고 무엇이 그 가르침에 맞는지 판단해야 한다. 본문은 스스로 회의를 주재하지 않으며, 실제로 설명하고 결정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지도자를 복음 아래 두자고 말해도, 무엇이 복음에 맞는지 판정할 권한을 그 지도자만 행사한다면 자신의 해석을 다시 하나님의 뜻으로 확정할 수 있다. 공통 고백을 지킨다는 말이 교정의 근거가 되려면, 그 고백을 해석하는 권한에도 질문이 닿아야 한다.
누구나 틀릴 수 있으니 서로 겸손하자는 말만으로는 이 난점을 풀 수 없다. 모두가 오류의 가능성을 지니지만, 모두가 자기 해석을 공동체의 결정으로 만들 권한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고백에서 특정한 사업의 추진이나 인사의 정당성이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그 사이에는 상황을 읽고 사람에게 미칠 영향을 가늠하는 판단이 들어 있다. 사도적 가르침의 권위를 오늘의 지도자가 내리는 모든 판단에 자동으로 넘겨줄 수 없는 까닭이다. 무엇을 근거로 해석했고 그 해석에서 지금의 결정이 어떻게 나왔는지 설명할 책임은 실제로 가르치고 결정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 설명을 들은 사람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발언권은 말하는 순간만 살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 문제를 제기한 뒤 맡은 역할에서 배제되거나 필요한 정보를 받지 못하고, 함께 지내던 관계까지 잃을 위험이 있다면 공개적인 발언 기회는 충분한 보호가 되지 못한다. 말할 기회가 있었다는 이유로 침묵을 동의로 셀 수 없는 까닭이다. 그 침묵을 공동체의 평안으로 부르기 전에, 이견을 밝힌 사람이 어떤 대가를 감당하게 되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런 위험 앞에 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나서서 공동체를 바꾸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배제나 보복의 가능성을 줄이고 안전하게 사실을 전하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할 책임이 공동체에 있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대화의 성사와 평화로운 결말까지 맡기는 것은 그 책임을 거꾸로 떠넘기는 일이다.
결정권자에게 돌아가는 부담은 다르다. 이미 세운 계획이 늦어질 수 있고, 설명에 시간을 써야 하며, 틀렸다고 인정하면 이전의 확신과 평판을 다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렇지만 이 부담을 소속과 역할을 잃을 위험과 같은 것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두 사람에게 똑같이 조금씩 양보하라고 요구하면, 결정권을 가진 쪽은 권한을 그대로 보유하고 다른 쪽만 문제 제기를 접는 결과가 나올 수 있다. 함께 자란다는 말이 한 사람에게만 계속 견디라는 요구가 되지 않으려면, 권한을 가진 이도 자신의 판단이 반론의 영향을 받도록 내놓아야 한다.
이의가 제기된 판단을 당사자 혼자 다시 심사하고 끝낼 수 있다면, 검토의 결론은 여전히 그의 허락에 달려 있다. 다른 이들이 본문과 판단의 근거를 함께 살피고, 당사자에게 결정을 수정하도록 요구할 수 있는 자리가 필요하다.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며 함께 자라라는 요구는 가르치는 이에게도 해당한다(엡 4:15–16). 이는 특정한 회의 방식을 성경이 직접 명령한다거나, 절차를 갖추면 성령의 일치가 확보된다는 뜻은 아니다. 절차는 서로의 말이 판단에 닿도록 도울 수 있어도, 그리스도께 함께 속한 이들을 사랑하며 그분을 향해 자라는 삶을 대신하지 못한다.
여러 지도자에게 권한을 나누더라도 그들의 합의가 잘못될 가능성은 남는다. 검토에 참여하는 사람 수보다 그들이 어떤 근거를 들을 수 있고 누구의 판단을 바꿀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결정의 영향을 직접 받는 사람이 전하는 사실을 배제한 채 윗사람들끼리 서로의 판단을 승인한다면, 권한은 분산되어도 교정은 일어나기 어렵다. 복음이 맺어 준 관계에는 그 결정을 감당해야 하는 지체도 함께 들어 있다.
반론을 보호하는 일이 반론의 승리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이의가 충분한 근거를 갖지 못할 수도 있고, 함께 믿는 복음에 어긋나는 주장은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교회가 결정을 내릴 책임도 남는다. 다만 어떤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과, 질문했다는 이유로 사람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구별된다. 모든 역할을 무조건 보장하자는 뜻도 아니다. 가르침과 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조차 그 판단이 비판에 대한 보복인지, 실제 사유에 근거한 것인지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
잘못이 확인되면 멈춰야 할 일을 멈추고, 배제한 기여를 다시 받아들이며, 그 결정이 낳은 손실을 줄이고 바로잡는 수고가 따른다. 사과를 받아 달라는 요구로 그 일을 대신할 수는 없다.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수정 이후의 설명과 뒷수습까지 떠맡는다면, 그 사람의 말은 받아들여져도 부담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는다. 결정을 내리고 실행한 이들에게 뒷수습의 책임이 돌아가는 것은, 함께 그리스도께 속한 지체의 시간과 삶을 그들이 내린 결정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공통 고백을 붙들기 위해 지도자의 모든 말을 보존할 필요는 없다. 그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해도, 교회를 부르시고 화해하게 하신 그리스도를 잃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화해가 공동체를 지탱하기에, 가르치는 이도 같은 주님께 속한 지체로서 다른 이들과 함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비추어 교정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