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 27장 끝에는 다윗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과 왕을 가까이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25–31절은 왕의 곳간과 밭, 포도원과 포도주 곳간, 감람나무와 뽕나무, 기름 곳간, 여러 가축을 맡은 이들을 기록합니다. 이어지는 32–34절에는 모사와 서기관, 왕자들을 섬기는 사람, 왕의 벗과 군대 지휘관이 나옵니다. 앞부분은 왕실의 자원과 생산을 관리하는 역할을, 뒷부분은 조언과 기록, 왕실과의 관계, 군사 지휘처럼 다른 성격의 역할을 보여 줍니다. 이 명단은 고대 왕국의 운영을 기록한 것이며 오늘의 교회나 일터가 그대로 따라야 할 조직도를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직무를 구분해 적은 방식은 한 가지 질문을 남깁니다. 맡은 역할은 무엇을 돌보며, 그 역할은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포도원과 포도주 곳간을 맡은 사람이 따로 기록된 대목을 살펴보면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포도원을 맡은 사람은 포도가 자라는 밭을 돌보고, 포도주 곳간을 맡은 사람은 거둔 소산을 보관합니다. 포도원은 자라는 것을 돌보는 자리이고, 곳간은 거둔 것을 맡는 자리이므로 살펴야 할 상태와 시점도 다릅니다. 같은 장에는 감람나무와 뽕나무를 맡은 사람과 기름 곳간을 맡은 사람이 따로 나오고, 소 떼도 사론과 골짜기로 나뉘어 기록됩니다. 본문은 자원과 장소를 구별해 누가 무엇을 맡았는지 드러냅니다. 이처럼 역할을 나누어 기록하는 것은 명단을 세밀하게 만드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맡았는지 알아야 그 일에 필요한 판단을 내릴 수 있고, 서로 다른 책임이 어디에서 이어져야 하는지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명단은 업무를 맡았다는 사실과 그 업무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판단을 구분하게 합니다.
가령 어떤 공동체에서 물품의 수량을 정확히 기록하고 보관 상태를 잘 유지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기록과 보관은 제대로 이루어졌지만 필요한 사람이 물품을 제때 받지 못했다면, 기록이 끝났다는 사실만으로 전체 일이 완성되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전달이 늦었다는 이유만으로 보관 담당자에게 잘못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누가 어디까지 맡았는지, 실제로 어떤 권한과 조건이 있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보관 담당자가 전달까지 책임지는지, 다음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가 넘어갔는지, 막힌 부분을 함께 의논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 확인은 책임을 서로 떠넘기기 위한 절차가 아닙니다. 일이 어디에서 멈췄는지 밝히고, 각자가 실제로 감당할 수 있는 몫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물품이 닿지 않았다는 결과는 중요하지만, 그 결과만으로 원인과 책임자를 미리 정할 수는 없습니다.
역대상의 명단은 직책을 기록할 뿐, 그 직책을 맡은 사람의 삶 전체를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아히도벨은 왕의 모사로, 후새는 왕의 벗으로 소개됩니다. 서기관의 기록, 모사의 조언, 군대 지휘관의 지휘는 서로 다른 일을 가리키며, 왕의 벗이라는 관계도 그 자체로 인물의 도덕적 평가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 기록만으로 두 사람이 모든 상황에서 어떤 동기와 태도를 지녔는지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직책은 그 사람이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알려 주지만,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했는지까지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명단만으로 각자의 권한이 같았다거나 직책의 가치 순서가 정해졌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역할의 차이는 서열을 정하기보다, 각자가 실제로 맡은 일과 내릴 수 있었던 판단을 먼저 구분해 보게 합니다. 직함이나 절차만 확인하면 실제로 어떤 판단이 내려졌고 그 판단이 누구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놓칠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마가복음 10장의 예수님 말씀은 책임과 권한을 바라보는 기준을 바꿉니다. 예수님은 이방의 통치자들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방식을 말씀하신 뒤, 제자들 가운데 큰 사람이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이어 인자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고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주려 한다고 밝히십니다. 제자 공동체에서 권한은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지위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앞의 가정 사례에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이 할 일은 잘못을 물을 사람을 찾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권한으로 필요한 일을 바로잡는 동시에, 책임을 묻는 일이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는 데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기준은 책임을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결정과 그 결과를 함께 살피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지도자가 친절하고 희생적인 사람이 되라는 조언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분은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 주시는 구속자이십니다.
이 대속은 우리가 책임을 감당하는 이유를 바꿉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누구나 되풀이할 수 있는 모범적 행동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만이 이루시는 구속의 행위입니다. 우리의 섬김은 그 구속을 대신하거나 다른 사람의 삶을 통제할 권리를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거나 구원의 자격을 얻기 위해 자신을 끝없이 소진할 필요는 없습니다. 필요한 수고를 감당하는 일은 사랑받을 자격을 얻으려고 자신을 소진하는 일과 다릅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맡은 책임을 면제하지도 않습니다. 섬김을 이유로 권한이 적은 사람에게만 더 오래 견디고 양보하라고 요구한다면, 권력의 방향은 바뀌지 않은 채 부담만 아래로 옮겨집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베푸신 사랑에 응답한다는 것은, 자기 증명의 압박에 매이지 않고 실제로 돌보아야 할 사람의 필요를 향해 자신에게 맡겨진 몫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맡은 일을 돌아볼 때, 업무가 끝났다는 기록을 최종 판단으로 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통해 필요한 사람이 실제로 도움을 받았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다면 내 권한 안에서 무엇을 바로잡을 수 있는지 살펴보는 것입니다. 모든 결과를 혼자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결정할 수 없는 부분을 인정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 한계를 이유로 내게 맡겨진 일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맡은 일을 마쳤다는 사실을 넘어, 그 일로 필요한 것을 얻게 될 사람까지 살피기 위해 오늘 무엇을 확인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