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는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창조되었다고 말하다가, 그 만물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일을 말한다. 창조의 주님과 화목을 이루시는 주님이 같은 분이라는 고백 안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긴장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붙드신다면 왜 화목이 필요한가. 화목이 필요하다면 지금의 세계에서 무엇을 좋다고 말할 수 있는가. 창조를 믿는다는 이유로 손대지 말아야 할 것과, 바로 그 믿음 때문에 고쳐야 할 것을 가르는 문제는 이 두 진술 사이에서 시작된다(골 1:15–20).
만물의 근원을 말하는 고백은 과거의 기원을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며 만물은 그 안에 함께 서 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세계의 지속과 목적도 그분께 달려 있다는 뜻이다. 사람이 다른 존재를 발견하고 이름 붙이며 이용하기 전에, 그 존재는 이미 창조주와 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쓸 곳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존재할 이유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필요는 피조 세계를 대하는 중요한 조건이지만, 그 세계가 존재하는 까닭 전체를 대신할 수 없다. 인간에게 큰 힘을 행사하는 권세들조차 본문에서는 창조된 것들 가운데 놓인다. 그 힘은 자기 존재의 근거도, 최종 목적도 아니다.
이 창조의 고백은 골로새서에서 죄 사함과 화목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 이들은 그 안에서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으며, 악한 행실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던 이들은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골 1:13–14, 21–23). 만물의 이야기를 인간의 도덕성과 무관한 자연 예찬으로 읽을 수 없는 이유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시고 만물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육체의 죽음으로 이 화목을 이루시는 분이다. 화목은 본래 아무 문제도 없었다는 확인이 아니다. 죄로 어긋난 관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다.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현재의 모든 행실과 지배에 대한 승인으로 바꾸면 이 구원의 문맥이 사라진다. 그렇다고 화목을 위해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 자체를 버려야 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십자가에서 화평을 이루시는 하나님과 그 일을 이루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와 구원은 서로 분리되지 않는다.
창세기 1장은 사람이 등장하기 전부터 빛과 땅, 식물과 생물을 하나님이 좋게 보셨다고 기록한다. 바다의 생물과 새에게도 복이 주어지며, 마지막 평가는 지으신 모든 것을 향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개역개정). 그 평가의 범위는 인간의 유용성 판단보다 넓다. 인간이 다스릴 사명을 받는다고 해서 나머지 피조물의 가치가 인간에게 쓸모 있는 정도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자기 능력을 증명하는 데 성공해야 비로소 존재의 가치를 얻는다는 생각도 이 장면과 어울리지 않는다. 선함은 피조물이 자신을 입증해 획득한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좋게 보셨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 선함을 말하려면 피조물이 어떻게 지음받은 존재인지도 함께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생명들은 모든 것을 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그려지지 않는다. 각기 구별되어 살아가며 먹을거리를 받는다. 다른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먹으며 사는 존재다(창 1:26–30). 이러한 관찰에서 피조물의 한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자기 삶을 온전히 자급하지 못하고 다른 존재와 주어진 조건에 기대어 살아간다는 사실이 곧 창조의 결함은 아니다. 창세기 2:1–3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고 기록한다. 그 완성은 피조물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유한한 존재를 좋다고 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아무것도 받지 않아도 되는 상태를 생명의 유일한 이상으로 삼기는 어렵다.
그러나 받으며 살아가는 것과 빼앗긴 채 살아가는 것을 같은 한계라고 부를 수는 없다. 먹을거리가 필요한 몸의 조건과 필요한 먹을거리를 얻지 못하게 하는 관계는 서로 다른 판단을 요구한다. 존재가 선하다는 것은 그 존재에게 닥친 모든 일이 옳다는 뜻이 아니며, 유한하다는 것은 지금 놓인 상태를 바꿀 수 없다는 뜻도 아니다. 사람이 만든 질서도 삶을 돕는 기능을 가질 수 있고, 자연에서 겪는 고통이라고 해서 보존해야 할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현실을 각각 선과 악으로 나누어 놓기보다, 그 안에서 생명이 어떤 조건으로 살아가는지 살펴야 한다. 무엇을 존중한다는 말인지, 그 말로 어떤 상태의 유지를 요구하는지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질서를 그대로 보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만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칠지는 정해지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음받은 존재를 존중하려면, 그 존재에게 주어진 성격과 한계가 우리의 선택을 어떻게 제한하는지도 물어야 한다.
오히려 바로 그 자리에서 강한 반론이 생긴다. 피조물에게 인간이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성격과 한계가 있다면, 무엇인가를 고치는 일도 그것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 현재 상태를 창조의 선함과 구별하면서 고칠 권한만 넓힌다면, 인간은 자기 욕망에 맞지 않는 특성을 모두 결함으로 분류할 수 있다.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세계를 만든다는 목적 아래 생명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조건을 없애면서도 개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고유한 성격을 말해 놓고 정작 그 성격이 인간의 선택을 제한하지 못한다면 피조물 존중은 실질적인 내용을 갖지 못한다. 존재를 존중한다는 명분으로 개입하면서 그 존재가 무엇인지를 결정할 권한까지 가져갈 위험이 있다. 이 반론은 변화에 대한 막연한 거부보다 깊다. 무엇이 손상이고 무엇이 지켜야 할 특성인지를 가르는 사람 자신이 누구의 기준에 서 있는지 묻기 때문이다.
이 반론을 받아들이면 고치는 일의 출발점이 달라진다. 먼저 결정한 목표에 존재를 맞추기에 앞서, 그 존재가 실제로 어떤 조건에서 살아갈 수 있는지 알아야 한다. 먹을거리를 받아야 하는 생명이라면 그 필요를 무능으로 취급해 없애는 것이 발전일 수는 없다.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일은 의존성을 모두 제거하려는 일과 목적부터 다르다. 같은 뜻에서 인간이 바라지 않는 특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제거할 정당성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는 고백은 피조물이 인간의 계획보다 앞서 그분께 관계되어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넓히는 능력만으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결정되지 않는다. 변화의 목적은 대상의 실제 성격과 필요를 배운 만큼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 배움에서 고치는 사람만 예외일 수는 없다. 골로새서는 세계의 잘못을 판정하는 인간을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 그 편지를 받는 이들 자신이 악한 행실 가운데 있다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사람들이다(골 1:21–22). 이 문맥에서 오늘의 책임을 생각하면, 교정하는 나의 선의와 지식도 죄와 오류의 가능성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을 내가 시행하려는 개혁과 동일시할 수 없는 까닭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에 응답한다고 해서 나의 수단에 하나님의 무오성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상대를 위해 한다는 목적이 상대에 관해 더 알아야 할 책임을 면제하지도 않는다. 무엇을 바꿀 것인가라는 질문은 이제 그 판단을 내리는 내가 무엇을 모르며, 내 선택의 결과를 누가 감당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좁아진다.
그렇다고 충분히 알 수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지금의 고통은 그대로 남는다. 로마서 8:18–23은 이 미완의 시간을 피조물의 탄식과 소망으로 말한다.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기를 기다리고, 성령을 받은 이들도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탄식한다. 기다리는 것은 몸을 가진 존재 자체의 폐기가 아니다. 창세기의 선함과 이 소망을 함께 읽으면, 몸을 지닌 삶을 귀하게 여기는 일과 그 삶을 괴롭히는 상태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일을 구별하되 떼어 놓지 않을 수 있다. 이 구별이 모든 고통의 원인을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다만 몸의 한계를 인정한다는 이유로 몸이 겪는 고통까지 선한 질서라고 부르는 추론은 막는다.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바람은 창조를 거부하는 태도라고 미리 정죄될 수 없다.
탄식하는 이들을 돕는 성령의 간구는 그들의 연약함 한가운데서 이루어진다. 마땅히 기도할 바조차 알지 못하는 이들이 하나님의 돌보심 밖으로 밀려나지 않는다(롬 8:26–27).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를 신앙의 실패로 재단할 수 없는 이유다. 이어지는 선의 약속도 지금 겪는 모든 일이 그 자체로 좋다는 평가와 다르다. 본문은 아들의 형상을 본받는 일과 하나님의 부르심, 의롭다 하심과 영화롭게 하심을 향한다(롬 8:28–30). 어떤 노력이 당장 문제를 없애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사람의 가치나 하나님의 목적까지 실패로 판정할 수는 없다. 이 기다림에는 내가 완성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인정과, 지금 필요한 응답을 포기하지 않는 책임이 함께 놓인다.
그 시간 안에 있는 공동체의 확신은 자기 제도의 완전함에서 오지 않는다. 에베소서 1:3–14는 창세 전의 선택과 아들을 통한 속량, 성령의 인침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흐름으로 묶는다. 성령이 기업의 보증이라는 진술은 이미 받은 구원의 선물과 기다리는 성취를 잇는다. 선택의 대상인 우리에 관한 말씀을 현재 사회의 모든 구조가 영원히 고정되었다는 설명으로 넓힐 수는 없다.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것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목적이지, 어느 공동체가 자기 방식에 부여할 수 있는 지위가 아니다. 교회는 자신이 그 목적에 완전히 도달했다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먼저 받은 구원에 응답하면서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한다.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려는 목적은 그 목적을 위해 사용해 온 특정 방식까지 영구히 정당화하지 않는다.
이를 구체적인 조건에서 생각해 보자. 어떤 공동체가 계단으로만 연결되는 장소에서 모이며, 구성원 한 사람은 그 계단을 이용할 수 없다고 가정한다. 실제 취재나 경험을 옮긴 이야기는 아니다. 그 사람이 모임에 참여하려 한다면 현재의 경로로는 그 장소에 이를 수 없다. 이때 계단을 이용하지 못하는 이유나 당사자의 필요를 짐작해 대신 결정하기보다, 공동체가 함께 모이려는 목적과 그 목적을 수행하는 방식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계단은 이동을 돕는 시설이지만 이 조건에서는 참여의 길을 제한하기도 한다. 공동체가 함께 모이려는 목적은 유지할 수 있어도, 그 목적을 이루는 특정한 공간 배치가 반드시 그대로 남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시설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한마디로 규정하는 일이 아니라, 그 방식이 한 구성원의 실제 몸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살피는 것이다.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는 판단은 그 몸이 기존 방식에 맞는지 심사하는 데서 끝날 수 없다. 참여할 길을 마련하는 일과 현재의 경로를 보존하는 일이 충돌하는 지점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 충돌을 풀려면 모임 장소나 이동 방식을 달리할 가능성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러나 피조물을 존중한다는 큰 뜻만으로 어느 방법이 실제로 적절한지 이미 안다고 할 수는 없다. 당사자가 어떤 참여를 바라는지, 제안한 방식이 그 몸에 무엇을 요구하는지, 공동체가 이용할 수 있는 공간과 자원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다른 방식을 마련했다는 사실만으로 도움의 적절성이 입증되는 것은 아니다. 이 과정에서 그 사람을 공동체의 선의를 보여 주는 대상으로 삼는다면, 앞에서 경계한 인간 중심의 재구성이 배려의 이름으로 되풀이된다. 새로운 방식 역시 당사자가 실제로 살아가는 조건에 맞는지 살피고, 필요하다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변경의 가능성뿐 아니라 그 변경을 누가 결정하고 어떤 부담을 감당할 수 있는지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그 책임을 계단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 공동체를 운영하고 방식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능력과 지식에도 한계가 있다. 공동체가 어떤 변경을 감당할 수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확인한 불가능과 아직 살펴보지 않은 가능성을 같은 말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가능한 길을 검토했으나 여건상 실행하기 어렵다는 판단과, 익숙한 방식을 벗어나 본 적이 없어 가능성을 알지 못한다는 상태는 다르다.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은 이 둘을 구분하고, 무엇을 더 알아보아야 하는지와 어떤 조정의 몫을 자신들이 맡을 수 있는지를 판단해야 한다. 상대의 한계에는 순응을 요구하면서 자기 방식의 한계에는 아무 수정도 허용하지 않는다면, 피조물의 유한성은 권한이 적은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이 된다.
그리스도께 속한 이를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그에게 먼저 요구할 수 없는 것은 자신의 방식에 맞는 몸이 되라는 것이다. 그를 지으시고 만물을 붙드시는 주님을 고백한다면, 그 몸이 살아가는 실제 조건 앞에 공동체의 방식도 검토의 대상으로 내놓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