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려야 한다는 책임은 느끼는데 마음은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공동체의 필요를 외면하고 싶지 않지만, 내게 맡겨진 생활도 꾸려 가야 합니다. 마음이 내키지 않는 채로 드리자니 억지 같고,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자니 책임을 미루는 듯합니다. 여기에 기쁨까지 요구받으면 내놓을 것뿐 아니라 내 마음도 부족해 보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어떻게 하나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을까요? 역대상 29장은 그 질문 앞에 한 사람의 사모함과 실제로 내어놓은 재물을 나란히 놓습니다.

다윗은 온 회중에게 성전 건축을 맡을 솔로몬이 아직 어리고 미숙하며 공사는 크다고 말합니다. 이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다윗은 이미 힘을 다하여 금과 은, 여러 재료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그 준비를 설명하던 말이 자신의 소유로 옮겨 갑니다. 공동체에 큰일이 남아 있다고 알리는 데서 더 나아가, 이미 마련한 것 외에 자신이 사유한 금과 은을 성전을 위하여 드립니다. 그의 말에는 성전이 누구를 위한 곳인지 거듭 드러납니다. 성전을 사모한다는 고백과 여호와께 드린다는 권면이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재물은 드리는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만, 그 쓰임의 중심에는 그 사람이 사모하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까닭은 다윗 자신이 밝힙니다. “내 마음이 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므로”(29:3).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자신에게 속한 재물의 쓰임을 바꿉니다. 다윗이 내어놓은 금과 은은 성전의 벽에 입혀지고, 기구를 만들며, 장인들이 일하는 데 쓰입니다. 사모한다는 말에 실제로 사용할 재산이 따릅니다. 마음의 크기를 금과 은의 양으로 환산할 수는 없지만, 여기서 마음과 재물은 서로 무관한 것도 아닙니다. 사모함은 자신의 소유를 지나 하나님을 위한 일에 닿습니다.

재물에는 다른 쓰임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떤 일을 위하여 내어놓는다는 것은 그만큼을 다른 데 쓸 수 없게 되는 결정입니다. 그래서 이 기록을 읽으며 헌신의 아름다움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윗의 드림에는 실제 무게가 있습니다. 본문에 나열된 재료들은 사모함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라 건축에 사용될 자원입니다. 우리의 드림도 삶의 계산 바깥에서 일어나지 않습니다. 무엇을 내어놓는지 알고, 그 선택으로 남게 될 책임까지 헤아리는 일은 자원함과 함께 갈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드림을 말한 뒤 회중에게 참여를 청합니다. “오늘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29:5). 이 물음에 앞서 그의 손에서 이미 나온 것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감당한 몫을 밝히고 다른 이들이 함께할 자리를 엽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한 사람의 마음이 그의 재산에 머물지 않고 공동체를 향한 권면으로 이어집니다. 큰일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몫부터 요구하기 쉬운 우리에게, 이 순서는 가볍지 않습니다.

이어서 가문과 지파의 지도자들, 군대의 지휘관들, 왕의 사무관들이 즐거이 드립니다. 금과 은뿐 아니라 놋과 철이 모이고, 보석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여히엘에게 맡겨 성전 곳간에 드립니다. 누가 어떤 감동을 받았는지 설명하는 대신, 기록은 사람들이 실제로 무엇을 내어놓았는지 보여 줍니다. 각자의 소유였던 재물이 성전 건축을 위한 예물로 드려집니다. 참여는 마음속의 찬성으로 남아 있지 않고, 건축에 쓸 수 있는 것으로 건네집니다.

본문의 시선도 다윗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응답한 지도자들과 백성에게로 넓어집니다.

29장 9절은 백성의 기쁨을 그들이 성심으로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일과 연결합니다. 다윗도 크게 기뻐합니다. 기록은 모인 재물의 양을 자세히 말하면서도, 기쁨의 까닭을 설명할 때에는 드리는 이들의 자원함을 짚습니다. 여호와께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일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모함이 소유를 내어놓는 행동이 되고, 그 행동을 함께 기뻐하는 데까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 기쁨을 읽은 사람이 당장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놓을 몫을 정하고도 생활의 무게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맡은 책임을 생각하며 오래 헤아려야 할 수도 있습니다. 기쁨까지 갖추어야 드림이 온전해진다고 여기면, 처음의 질문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모든 응답을 뒤로 미루면 공동체의 필요는 그대로 남습니다. 비용을 지우지도, 마음을 억지로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자기 몫을 건넬 수 있을까요.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권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부요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고, 그분의 가난함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고후 8:9). 이 연보의 목적은 다윗 시대의 성전 건축과 다릅니다. 다만 자기 소유를 내어놓아야 하는 이들에게 바울이 먼저 가리키는 것은 이미 그들을 향하여 주어진 은혜입니다. 우리가 응답할 차례에 이르기 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은혜 앞에서 드림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대가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사랑을 받은 자리에서 자신의 소유와 이웃의 필요를 다시 볼 수 있습니다. 내게 있는 것이 내 생활을 지탱하는 자원인 동시에 다른 이의 부족함을 보충할 수 있는 자원이기도 합니다. 내 삶을 귀히 여기는 만큼, 도움이 필요한 이의 삶도 귀히 여길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공동체에게 그들의 마음에 있던 나눔을 실제로 이루라고 권합니다. 받은 사랑을 어떤 재물의 쓰임으로 이어 갈지가 이제 우리에게 주어진 물음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말한 뒤에 나오는 권면은 뜻밖에 구체적입니다. 마음에 원하던 일을 이제 완성하되 “있는 대로 하라”고 합니다(고후 8:11). 시작한 뜻을 실제 행동으로 잇는 책임과, 현재 가진 것을 따라 드리는 분량이 한 문장 안에 있습니다. 원하기만 하고 끝낼 수 없지만, 없는 것까지 마련하여 자기 마음을 증명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의 형편을 살피는 일은 드림에서 물러나는 구실로만 쓰일 이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약속을 실제로 감당하기 위하여 반드시 알아야 할 현실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한쪽은 편안하고 드리는 쪽만 곤고해지는 상태를 바라지 않습니다. 지금 넉넉한 이들의 것으로 다른 이들의 부족함을 채우고, 다시 그들의 넉넉함이 이쪽의 부족함을 채우게 하려 합니다(고후 8:12–15). 이 공동체에서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굳어진 자리를 차지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도움을 받는 이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며, 오늘 드리는 이의 필요도 공동체가 돌보아야 할 필요입니다. 은혜에 응답하는 책임은 개인에게만 내려앉지 않고 서로의 삶을 향하여 이어집니다.

그래서 자신의 형편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자리도 함께 필요합니다. 공동체가 참여를 청할 때에는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쓰일지 알리고, 응답하는 이들이 감당할 수 있는 몫을 헤아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사모함도 막연한 다짐을 벗어나 구체적인 선택을 얻습니다. 내 생활을 위해 남겨 두어야 할 것과 함께 쓰도록 내놓을 것을 살피며, 감당하겠다고 정한 몫은 실제로 건네는 것입니다.

그렇게 드린 뒤에도 서로의 삶을 향한 관심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누군가의 참여를 기뻐했다면 그가 도움을 필요로 할 때에도 그의 자리를 지켜 주어야 합니다. 드리는 이도 돌봄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을 때, 한 사람의 부담이 다른 사람의 넉넉함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는 대답을 서두르기보다, 지금 건넬 수 있는 몫을 건네고 함께하는 사람들의 형편을 더 듣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