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사역을 맡아 준 동역자에게 다시 참여를 요청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 그의 수고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가 감당한 일을 기억하고 다음에도 협력을 구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함께 섬겨 온 관계에는 신뢰가 쌓이고, 그 신뢰 덕분에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있습니다. 다만 이전의 헌신이 다음 요청의 내용을 모두 대신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맡길 일의 범위와 기간, 그 사람이 이미 감당하는 책임과의 관계는 다시 살펴야 합니다. 부탁하는 사람에게도 새로 판단할 몫이 있습니다.
이 말을 수고를 줄이자는 권고로만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공동체가 약속한 섬김에는 그 일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향한 책임도 있습니다. 맡겠다고 한 일을 힘들다는 이유만으로 내려놓으면 누군가는 그 빈자리를 감당해야 합니다. 한 사람이 쉬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좋은 결정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남은 동역자의 부담이 늘거나 필요한 섬김이 끊긴다면, 처음의 어려움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갔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헌신을 존중한다는 말에는 이미 맡은 약속을 지킨다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공동체가 어려운 일을 함께 감당하려면 서로의 응답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참여를 그때그때의 편의에 맡겨 둘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무게를 인정하는 일과, 한 번 맡았다는 이유로 역할과 기간을 계속 늘리는 일은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의 내용이 무엇인지 분명히 할 때, 필요한 수고를 요청하는 이유도 더 정직해집니다.
창세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하게 지으시고 그에게 실제로 할 일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며 복과 함께 다스림의 책임을 받았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일과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일은 이 본문에서 함께 놓입니다. 사람과 동물에게 먹을 것이 주어지고, 창조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완성과 그치심으로 마무리됩니다(창 1:26–2:3). 삶은 계속 투입할 힘을 확보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돌보시며 사명을 맡기신 자리입니다.
사역을 계획하는 사람도 이 자리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지으셨다는 고백은 내가 정한 일정까지 선하다는 보증이 되지 않습니다. 동역자의 몸과 시간은 내 계획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이며, 그 안에는 이미 감당하고 있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을 살피는 일은 사역의 중요성을 낮추는 일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어떤 일을 부탁하는지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창조의 선함을 믿는다면 요청하는 쪽도 자신의 계획을 판단의 대상에 놓아야 합니다.
골로새서는 그 판단이 향할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합니다. 만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으며, 그분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화목을 이루십니다(골 1:15–20). 교회는 그리스도께 생명과 사명을 받는 공동체입니다. 사역을 계획하는 사람의 수고 역시 그분께 받은 것을 섬기는 자리에 있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면, 내가 선택한 일정과 규모를 지키는 일이 곧 주님의 뜻을 지키는 일인지 물을 수 있습니다.
그 질문이 사역을 가볍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몸으로 고난을 겪으며 힘을 다해 수고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향한 목적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골 1:28, 개역개정).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는 일은 가르침과 권면을 필요로 하며, 때로 오래 기다리고 자기 시간을 내어 주는 수고를 요구합니다. 그 목적 때문에 기꺼이 감당해야 할 부담이 있습니다. 활동이 힘들다는 사실만으로 그 수고를 부당하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노력만을 말하고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고백합니다(골 1:29, 개역개정). 실제로 애쓰는 사람과 그 수고를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한 문장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맡은 일에 자신의 힘을 쏟으면서 그 힘의 근원을 하나님께 둡니다. 이 의존을 동역자의 몸이 끝없이 일을 감당할 수 있다는 약속으로 옮길 수는 없습니다. 계획자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동역자의 현재 조건을 묻는 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각 사람을 세우려는 사역에는 그 일을 함께 수행하는 동역자도 포함됩니다. 그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 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를 대하는 방식은 사역의 목적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참여를 요청하면서 그의 현재 책임을 듣고 계획을 검토하는 것은 이 목적을 오늘의 관계에서 따르려는 판단입니다. 성경이 일정 협의의 순서를 정해 주지는 않지만, 누구를 위하여 무슨 일을 하는지 잊은 채 일정만 유지하는 것으로 충실함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미 맡겠다고 한 일이 있다면 그 약속부터 존중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한 번 응답했다는 이유로 다음 일의 범위와 기간까지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이름의 사역이라도 맡길 일이 늘거나 참여가 이어지는 기간이 달라지면 요청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그때는 이전의 수고를 새 부담에 대한 답으로 대신할 수 없습니다. 현재 감당할 조건을 살피고, 계속 맡을 수 있는 책임을 함께 정해야 합니다.
약속한 뒤에 조건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처음 정한 방식만 고수한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맡은 일을 어떻게 이어 갈지 함께 살피는 것까지 책임에 속합니다. 가정이나 생계라는 이름만으로 사역보다 언제나 앞선다고 정할 수도 없고, 교회 일이라는 이유로 다른 책임을 뒤로 밀 수도 없습니다. 지금 미룰 수 없는 일이 무엇이며, 누가 대신할 수 있는지, 그 결정으로 누구의 삶이 어려워지는지를 실제로 알아야 합니다.
동역자가 참여하겠다고 답한 뒤에도 계획자의 판단은 남습니다. 동의는 함께 일할 중요한 근거이지만, 현재의 규모와 속도까지 모두 적절하다는 증명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맡을 수 있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 반복되는 부담과 다른 책임의 충돌을 더는 살피지 않는다면, 계획자는 자신이 판단해야 할 몫을 그 대답에 맡긴 셈입니다. 선한 뜻으로 응답한 사람을 존중하는 일에는 그 응답을 받은 뒤에도 내 선택을 계속 검토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참여를 조정해야 할 때에는 활동의 방식과 그 활동이 맡고 있던 책임을 나누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횟수나 규모를 줄여도 지킬 수 있는 섬김이 있는지, 지금의 형식을 유지하느라 정작 사람을 세우는 일이 약해지지는 않는지 살펴야 합니다. 익숙한 진행 방식을 바꾸는 데에는 설명과 수고가 따릅니다. 그 비용을 피하려고 동역자에게만 조금 더 감당해 달라고 한다면, 계획자의 선택은 그대로 둔 채 다른 사람의 헌신으로 어려움을 해결하려는 것이 됩니다.
반대로 활동을 줄였다는 이유만으로 책임까지 끝났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공동체가 계속 감당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면 누가 그것을 맡을지 함께 판단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참여를 줄이고 그 몫을 남은 사람에게 말없이 더하면 부담의 자리가 바뀔 뿐입니다. 일의 전체 범위를 줄일 수 있는지 먼저 검토하고, 그래도 남는 수고는 그 필요와 크기를 드러내어 함께 감당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누구도 힘들지 않은 결정을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필요한 희생을 요청하되, 그 희생이 누구에게 얼마나 더해지는지 모르는 채 넘어가지는 말아야 합니다.
계획자도 이 조정의 바깥에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정한 방식을 바꾸고, 줄어드는 활동을 설명하며, 남은 책임을 어떻게 지킬지 결정하는 수고가 있습니다. 직접 더 맡을 수 있는 일은 맡되, 개인의 추가 노동만으로 모든 문제를 덮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끝까지 필요한 일과 지금의 형식을 구별하는 판단 자체를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동역자에게 책임을 요청하는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함께 지는 몫입니다.
다시 참여를 부탁할 수는 있습니다. 이미 맡은 약속을 지켜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계획자가 내놓아야 할 것은 사역의 필요에 대한 설명과 함께, 자신의 선택도 살피고 바꿀 수 있다는 책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을 세우는 일은 요청받는 사람의 헌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부탁하는 사람 역시 그 목적 아래에서 자기 계획을 판단받고, 필요한 수고와 조정의 비용을 함께 감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