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와도 좋다는 말에는 문을 여는 호의가 담겨 있다. 그러나 처음 온 사람이 모르는 표현을 물을 때마다 대화의 흐름을 끊는 사람으로 취급된다면, 그 자리는 어디까지 열려 있는가. 참석은 허락했어도 말하는 속도와 질문하는 방식은 먼저 와 있던 사람들이 정해 놓았을 수 있다. 새로 온 사람은 초대받은 뒤에도 자신이 이곳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계속 증명해야 한다. 문을 열었다는 선언만으로는 잘 보이지 않는 문턱이다. 환대를 살피려면 누가 들어올 수 있는지와 함께, 들어온 사람에게 누가 어떤 대답을 요구하는지 물어야 한다.

자크 데리다의 환대에 관한 사유는 이 문턱을 불편하게 드러낸다. 통상적인 의미에서 누군가를 맞이하려면 내어 줄 장소와 그것을 사용할 권한이 필요하다. 그 권한으로 손님을 들일 수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 호의가 권력과 만나는 지점이다. 『환대에 대하여』에서 데리다가 짚는 역설은 집을 지배하는 주인의 권한이 환대를 가능하게 하면서 동시에 선별과 배제를 낳는다는 데 있다. 선한 주인에게 악의가 숨어 있다는 폭로만으로는 이 문제에 닿지 못한다. 성실하게 맞이하려는 사람도 누구에게 무엇을 허용할지 결정해야 하며, 그 결정에는 자신의 기준으로 타인의 자리를 정하는 힘이 실린다.

조건부 환대는 이러한 결정이 규칙과 약속의 형태를 얻은 환대다.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을 정하고, 함께 쓰는 공간의 질서를 마련하며, 서로에게 허용되지 않는 행동을 밝힌다. 조건은 배제의 장치가 될 수 있지만 보호의 약속도 될 수 있다. 정해진 기간 동안 머물 권리가 보장된다면 손님은 주인의 기분이 바뀔 때마다 떠날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을 요구받고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약한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도 중요하다. 아무 규칙이 없는 관계에서는 관대함을 베푸는 사람의 변덕이 사실상의 법이 될 수 있다.

데리다는 1997년 도미니크 동브르(Dominique Dhombres)와 나눈 『르몽드』 인터뷰에서 조건이 집을 보호하는 동시에 환대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조건을 가진 환대를 모두 위선으로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다. 다만 조건이 필요하다는 사실에서 지금 있는 조건이 모두 정당하다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공동생활을 위해 필요한 약속과 기존 구성원의 익숙함을 지키기 위한 요구가 같은 이름으로 묶일 수 있다. 그 둘을 가려내려면 규칙이 있다는 사실보다 규칙이 누구에게 어떤 부담을 지우는지 들여다보아야 한다.

무조건적 환대는 이러한 판단이 스스로 완결되었다고 믿을 수 없게 하는 요구다. 이름과 출신, 되돌려 줄 능력으로 상대의 자격을 확인하기에 앞서 그가 올 자리를 내어 준다는 뜻이다. 조건을 몇 가지 덜 붙인 너그러운 환대와도 다르다. 조건부 환대가 정해진 기준에 따라 맞을 사람을 가린다면, 무조건적 환대는 그 기준에 포착되지 않는 낯선 이에게도 열릴 것을 요구한다. 아직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도래가 나의 이해와 허락보다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환대하는 쪽이 관계의 모든 의미를 미리 정해 둘 수 없게 된다.

두 환대는 하나의 눈금 위에 놓인 적당한 친절과 더 큰 친절이 아니다. 무조건적 환대의 요구는 어떤 선별에도 다 담기지 않지만, 실제 환대에는 머물 장소와 책임의 배분이 필요하다. 데리다는 두 환대가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조건을 세우면 무조건성에 미치지 못하고, 조건을 모두 없애면 구체적으로 맞이할 수단마저 무너질 수 있다. 여기에는 두 입장을 절반씩 받아들여 끝낼 수 없는 긴장이 있다. 좋은 제도는 환대를 실현하는 데 필요하지만, 어떤 제도도 환대의 의미를 다 소유할 수는 없다.

이 긴장은 이름을 묻는 짧은 말에도 들어 있다. 데리다는 이름을 묻기 전에 맞이하는 환대를 말하면서도, 한 사람을 고유하게 부르기 위해 이름을 묻는 일을 지우지 않는다. 상대를 불특정한 대상에 머물게 하지 않으려는 물음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 말을 건네는지 알고 싶은 마음과, 그가 들어와도 되는 사람인지 심사하려는 요구는 같은 문장을 사용할 수 있다. 질문의 존재만으로 환대와 배제를 가를 수 없으며, 질문하지 않는다고 언제나 더 깊이 존중하는 것도 아니다.

차이는 질문이 상대의 답에 무엇을 맡기는가에서 드러난다. 상대가 자신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말할 수 있다면 이름을 묻는 일은 관계를 시작한다. 반대로 정해진 항목에 맞는 답을 내놓아야만 말을 더 들을 수 있다면 이름은 통과의 조건이 된다. 말투가 공손해도 이 구조는 달라지지 않는다. 대답하기 어려운 까닭을 설명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채 침묵을 의심의 증거로 삼는다면, 질문하는 쪽은 답변의 형식과 그 답변의 판결을 함께 독점한다. 상대는 말할 기회를 얻었지만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설명할 자리는 얻지 못한 셈이다.

언어의 문제는 이 비대칭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같은 인터뷰에서 데리다는 외국인이 자신의 언어가 아닌 법의 언어로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상황을 짚는다. 그가 말하는 번역의 과제는 외국인에게 기존 언어를 가르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법과 법의 언어가 바뀌는 일까지 포함한다. 권리를 말할 수 있는 문이 열려 있어도, 그 문을 통과하는 말을 오직 권한을 가진 쪽에서만 정한다면 낯선 사람은 자신의 처지를 먼저 그 형식에 맞추어야 한다. 알아들을 책임을 누구에게 지우는지가 환대의 실제 조건이 된다.

일상에서도 이 문제를 제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어떤 모임이 질문을 허용하면서 이미 익숙한 표현으로만 질문하라고 요구한다면, 가장 설명이 필요한 사람에게 가장 능숙한 설명을 요구하는 셈이다. 서툰 말을 고쳐 듣는 시간은 들이지 않으면서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할 책임을 상대에게 모두 돌릴 수도 있다. 이때 발언 기회의 평등은 이해받을 가능성의 평등과 어긋난다. 말이 끊기거나 순서가 어긋났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생각도 불분명하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다. 듣는 쪽의 익숙함이 이해의 유일한 척도가 되는 순간을 살펴야 한다.

그렇다고 일상모임의 불편과 국가의 입국 심사나 체류를 둘러싼 법을 같은 규모로 다룰 수는 없다. 친분에 기대어 조정하는 대화와 공권력이 사람의 지위를 결정하는 절차는 권한도 결과도 다르다. 국가의 책임을 집주인의 너그러움으로 설명하면 권리로 보장되어야 할 일을 호의의 문제로 낮출 위험이 있다. 두 영역을 연결하는 것은 동일한 해결책이 아니라, 기준을 정하는 쪽과 그 기준 앞에 서야 하는 쪽의 차이를 살피는 질문이다. 법의 영역에서는 그 차이를 다루기 위해 당사자의 권리와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절차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는 시간과 힘이 든다. 공간은 유한하고 돌봄을 맡은 사람의 체력에도 한계가 있으며, 이미 안에 있는 사람들도 안전하게 지낼 권리가 있다. 누구든 맞이하라는 말이 이런 현실을 지나쳐 버린다면 환대는 지속되기 어렵다.

특히 열림을 선언하는 사람과 매일 설명하고 정리하며 갈등을 감당하는 사람이 다를 때, 아름다운 선언의 무게는 다른 사람의 몸에 쌓일 수 있다. 환대의 이름으로 그의 피로를 사소하게 취급한다면, 밖의 타인을 존중하겠다는 말로 안의 타인을 소모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반론은 환대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감당하고 있는지를 바꿔 묻게 한다. 머물 자리를 내어 주겠다고 결정한 사람에게는 그 자리를 유지할 일을 함께 조직할 책임이 있다.

통역과 설명을 특정인의 호의에 맡겨 두었다면, 그 사람이 지쳤을 때 그 일을 나눌 사람과 시간을 마련할 수 있는지 먼저 살펴야 한다. 배분을 바꿀 여지는 남겨 둔 채 개인의 피로를 공동체 전체의 불가능으로 부르는 것은 성급하다. 당장 더 맡을 수 없다는 사람의 판단은 존중해야 한다. 동시에 그 판단을 공동체 전체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는 결론으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더 희생하는 방식을 멈추고도 함께 감당할 범위를 넓힐 여지는 따로 살펴볼 수 있다.

안전 역시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이미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불편을 우선권으로 바꿀 수는 없지만, 밖에서 온 사람을 맞는다는 이유로 실제 위험을 가볍게 볼 수도 없다. 폭력이나 강요를 막는 제한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임이며 새로 오는 사람에게도 필요하다. 다만 낯선 억양이나 익숙하지 않은 생활방식에서 오는 불편을 위해의 증거처럼 취급한다면 안전이라는 말이 차이를 거부하는 데 쓰인다. 위험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제한의 범위를 그 위험에 맞추는 일에는 수고가 든다. 그 수고를 생략할수록 경계는 넓고 막연해지고, 낯선 사람은 자신의 무해함 전체를 증명해야 한다.

유한함을 인정한다는 말도 같은 주의를 요구한다. 지금 내어 줄 수 있는 자리가 얼마인지는 실제로 계산해야 한다. 그러나 그 계산에 들어가는 시간과 공간, 비용의 배분까지 모두 바꿀 수 없는 사실로 취급할 필요는 없다. 돌봄에 더 많은 자원을 배정할지, 익숙한 활동을 조금 줄일지, 부담을 나눌 사람을 찾을지는 판단의 영역에 속한다. 모든 한계를 곧 없앨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할 수 없는 일과 아직 함께 하기로 결정하지 않은 일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이 구별이 없으면 한계의 확인이 검토를 끝내는 말이 된다.

그러고도 거절해야 하는 경우는 남는다. 어떤 거절이든 더 생각하면 반드시 수용으로 바뀐다고 말할 수 없다. 어려움은 거절의 필요를 설명한 뒤에도 그 결정으로 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남는다는 데 있다. 사정이 정당하다는 것과 상대에게 손실이 없다는 것은 다른 판단이다. 모든 결과를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은 어떤 결과도 더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른 길을 안내할 수 있는지, 기간이나 방식을 달리하면 가능한지 묻는 일은 거절 뒤에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런 가능성마저 없다면 그 한계를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그 거절이 누구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지우지 않아야 이후의 판단에서도 그 사람의 사정을 고려할 수 있다.

토마스 아스호이어(Thomas Assheuer)와의 인터뷰에서 데리다는 무조건적 환대를 그대로 규칙이나 입법에 새길 수 없으며, 곧바로 정책으로 옮기면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법과 관습을 바꿀 책임은 긴급하다. 그에게 불가능성은 행동을 포기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결정불가능성도 결정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기존 규칙이 각자의 사정 앞에서 무엇이 정당한지를 자동으로 보증해 주지 않으므로, 결정하는 사람이 매번 판단을 책임져야 한다는 문제다. 자료를 확인하고 위험을 계산하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 결정은 그 작업을 거친 뒤에도 남는 선택의 몫을 떠맡는다. 완벽한 답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그 결정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런 의미에서 환대의 불가능성은 더는 할 일이 없다는 결론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늘 부족하다는 죄책감을 안고 살라는 요구로 바꿀 수도 없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조급함은 상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듣는 시간을 오히려 빼앗을 수 있다. 책임의 초점은 나를 완전히 선한 사람으로 만드는 데서 지금의 조건이 놓치는 사람을 더 정확히 알아보는 데로 옮겨 간다. 조건을 하나 고쳤다고 내 환대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 조건 때문에 말하지 못했던 사람이 자신의 사정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면, 그 변화는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취소되지 않는다.

더 급진적인 열림은 이런 선택 속에서 환대하는 사람의 위치까지 건드린다. 손님이 감사하는 동안에만 환대가 유지되고, 이곳의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배은망덕한 사람이 된다면 그는 허락받은 자리에 계속 머물 뿐이다. 자신의 조건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조건 자체를 질문할 수는 없다. 이 구조에서는 주인이 상대에게 자리를 주는 동안 자기 기준은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다. 낯선 이가 던지는 질문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는 약속과 다르다. 무엇이 적절한 요구인지 판단해 온 기준도 그의 말 앞에서 검토받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 검토는 이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말까지 함께 들어야 한다. 손님의 요구와 돌보는 사람의 한계가 충돌할 때 어느 한쪽을 환대의 적으로 만들어서는 판단할 수 없다. 서로의 말이 충분히 들렸다고 쉽게 확신해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오래 사용한 언어로 자신의 사정을 설득력 있게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같은 시간을 받고도 필요한 말을 끝내지 못한다. 모두에게 발언 시간을 주었다는 사실 뒤에도 듣는 쪽이 더 감당할 몫이 남을 수 있다. 이해하는 수고를 함께 나누는 방식으로 질문의 조건을 바꾸는 것은, 환대받는 사람을 응답만 하는 위치에서 조금씩 벗어나게 한다.

그렇게 고친 절차에도 다시 문턱이 생긴다. 통역을 마련해도 옮기기 어려운 말이 남고, 시간을 더 주어도 기다릴 수 없는 사정이 있을 수 있다. 무조건적 환대와 현실의 조건 사이를 잇는 일이 완성된 절차 하나로 끝나지 않는 까닭이다. 오늘의 수정은 실제로 누군가에게 자리를 내어 줄 수 있으면서도,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영구한 증명은 되지 못한다. 이 긴장은 결정을 무효로 돌리지 않는다. 다만 결정을 내린 사람이 더는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근거를 거두어 간다.

환대를 돌아볼 때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감사만 듣는다면, 문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한 사람의 사정은 남기 어렵다. 문을 열었다는 평가는 그 문을 통과한 사람들의 말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다음에 이름을 물을 때도 우리는 대답을 들어야 하고 필요한 조건을 설명해야 한다. 그 사람이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하면, 그 말은 우리 질문의 적절함도 다시 묻게 한다.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기 전에, 이해받기 위해 그에게 무엇을 요구해 왔는지 문을 연 쪽이 답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