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15절). 아가의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의 아름다움을 거듭 말합니다. 다음 절에서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16절). 아름답다는 말이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상대에게 건너갑니다. 칭찬을 받는 여자도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을 말합니다. 한 사람의 찬사에 이어 다른 사람의 응답을 들을 때, 이 노래의 기쁨도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구체적인 모습을 기뻐합니다. 눈을 비둘기에 견주고, 사랑하는 이를 품에 둔 향주머니와 꽃송이에 견줍니다. 향기와 몸의 가까움이 사랑의 언어가 됩니다. 이 노래 곁에서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토록 반가워하는 마음에 머물게 됩니다.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말로 건네는 기쁨도 성경 안에 있습니다. 누군가를 깊이 좋아할 때 몸과 감각으로 알아차리는 세계를, 아가는 향기와 빛깔을 지닌 말로 들려줍니다. 아름답다는 말은 사랑하는 이를 ‘너’라고 부르는 말입니다. 다른 누군가로 쉽게 대신할 수 없는 한 사람을 향합니다. 이 부름을 따라가며 우리는 사랑받는 사람의 얼굴뿐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여자는 이미 5–6절에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햇볕 아래 포도원을 돌보던 사정을 말했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삶을 들려줄 말이 있고, 사랑하는 이를 기뻐하며 부를 말도 있습니다. 16절의 화답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인정받는 사람과 함께 아름다움을 알아보고 말하는 사람을 만납니다. 남자의 눈에 비친 모습 곁에 여자가 자기 목소리로 들려주는 삶이 있습니다.

이 두 목소리를 듣고 나면, 가까운 사람을 잘 안다고 여기는 우리의 시선에도 질문이 생깁니다. 누군가의 인내를 높이 여기는 일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를 늘 잘 견디는 사람으로만 알고 있다면, 그가 힘에 부친다고 말할 때에도 우리가 알고 있던 장점이 먼저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수고를 인정하던 말에 앞으로도 같은 몫을 감당해 주리라는 기대가 실립니다. 상대를 좋게 생각하면서도 그가 지금 하는 말을 충분히 듣지 못하는 일이 가능합니다. 그럴 때 칭찬받는 사람에게 남는 자리는 좁아집니다.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계속 보여 주어야 할 것처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삶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꺼내도 좋다는 여지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함께 지내며 알게 된 성품과 지나온 시간은 소중합니다. 다만 그 앎이 그의 다음 말까지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잘 아는 사람의 낯선 이야기를 듣는 데에는 용기가 듭니다.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었음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자기 말로 알려 주는 삶을 들을 때, 함께 지나온 시간도 지금의 그를 만나는 길이 됩니다. 우리의 좋은 평가 안에도 다 담기지 않는 한 사람이 거기에 있습니다.

서로 아름답다고 말하는 연인의 기쁨 곁에는 다른 질문도 남습니다. 그런 찬사를 듣지 못하는 사람, 연애나 결혼의 관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존엄은 어디에 놓일까요? 누군가가 아름답다고 불러 주어야만 사람이 귀해진다면, 사랑의 말이 들려오지 않는 자리에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부담까지 남을 것입니다. 아가의 기쁨을 소중히 읽으면서도 인간의 존엄을 연인의 인정에 맡길 수 없는 이유입니다.

성경의 첫머리는 사람의 자리를 더 앞선 곳에서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고,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며 좋게 여기셨습니다(창 1:27, 31). 누군가의 눈에 들기 전에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마음에 드는 점을 발견하기 전에도 그의 삶은 귀하며, 우리의 기대와 다른 말을 한다고 해서 그 존엄이 줄어들지 않습니다. 우리가 귀한 존재라는 고백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까지 없애 주지 않습니다. 사랑의 말이 없어도 존엄은 남지만, 그 말을 기다리는 마음은 아플 수 있습니다. 그 귀함을 믿는다면 사랑의 부재가 남기는 아픔에도 마음을 기울이게 됩니다. 혼자 견디는 이에게 가까이 갈 이유는 그가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어서만은 아닙니다. 나의 호감 밖에도 하나님이 지으신 삶이 있습니다.

이 믿음 안에서 아름답다는 말은 이미 귀한 사람에게서 발견한 기쁨을 건네는 말이 됩니다. 내가 그를 만나고 그의 모습을 좋아할 수 있다는 사실도 선물입니다. 그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면서,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그의 삶에도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가 나의 기대와 다른 이야기를 할 때에도 그를 귀히 여길 근거는 남아 있습니다.

사람의 존엄을 아는 우리도 실제 관계에서는 자주 좁아집니다. 누군가에게 베푼 사랑이 내가 괜찮은 사람임을 확인받는 길이 되어 버리면, 그의 뜻밖의 응답 앞에서 마음이 급해집니다.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듣기보다 내 진심을 설명하는 일이 먼저일 수 있습니다. 선한 마음으로 시작한 관계에서도 상대는 어느새 나를 안심시켜 주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일에는, 그의 응답에 나 자신을 증명할 책임까지 지우지 않는 자유가 필요합니다.

요한일서는 사랑의 시작을 하나님이 하신 일에 둡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으며,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보내셨습니다(요일 4:9–10).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여 얻어 낸 응답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향한 호의의 표현에 머물지 않고, 죄에 매인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용서받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길을 얻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는 일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누군가를 돌보고 좋은 말을 건네는 나 역시 하나님께서 살려 주신 사람입니다. 내 사랑에도 잘못이 있음을 인정하고, 상대의 사정을 충분히 듣지 못했다면 이미 한 말을 고칠 수 있습니다. 고마워할 줄 모른다고 여겼던 사람에게서 미처 알지 못한 사정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동안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흔들릴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께 받은 사랑의 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사랑을 의지하여 나를 지키는 데 급급했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 사랑을 우리의 책임으로 잇습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서로 사랑할 책임은 이미 받은 사랑에서 자라납니다.

그 책임을 우리의 관계에 가져오면, 상대에게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가와 함께 그의 말을 어떻게 듣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인내심을 칭찬해 온 사람이 이제 힘에 부친다고 말한다면, 그의 수고를 알아주는 만큼 그 몫을 함께 나눌 길도 살펴야 할 것입니다. 그가 감당하리라 여기며 내 몫에서 덜어 두었던 일은 없는지도 돌아보게 됩니다. 그 일을 위해 내가 쓰던 시간을 내어 주거나 익숙한 일정을 바꿔야 할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에는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수고가 사랑의 몫으로 다가옵니다. 그의 사정을 듣고 나면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기대도 달라져야 할 수 있습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를 대하는 나의 몫을 다시 살피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서로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자리에서도 다름은 남고 판단은 필요합니다. 그 말에 동의하기 어려울 때에도 나의 선의가 상대를 대신해 말할 권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가로 돌아오면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립니다. 여자도 사랑하는 이를 어여쁘다고 부릅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는 말 사이로 사랑의 기쁨이 오갑니다. 가까운 사람을 향해 품고 있는 좋은 생각들 사이에도 그가 말할 자리가 남아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는 내가 미리 써 둘 수 없습니다. 내가 귀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아직 내가 듣지 못한 그의 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