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3장은 찾는 말로 시작합니다. 밤의 침상에서 사랑하는 이를 찾지만 찾지 못하고, 시의 목소리가 성 안의 거리와 큰길로 옮겨 가도 찾음은 계속됩니다. 같은 말이 거듭될수록 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선명해집니다.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습니다. 사랑은 누군가의 부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일인지를 알게 합니다.
혼자서 삶을 꾸려 갈 수 있어도 누군가를 몹시 그리워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곁에 있을 때와 없을 때 내 하루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그 사람이 내게 어떤 도움을 주는지만으로는 이 차이를 다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일로 삶을 가득 채워도 그 사람의 자리는 그대로 남을 수 있습니다. 아가의 찾는 목소리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고유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들려줍니다.
여인은 성 안을 순찰하는 이들에게 사랑하는 이를 보았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나친 뒤 마침내 그를 만납니다. 찾음의 말은 붙듦의 몸짓으로 바뀝니다. 그녀의 말은 그를 붙잡고 어머니의 집으로 가기까지 놓지 않았다는 서술로 이어집니다. 찾아낸 이를 오래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거듭되던 찾음을 지나 이 몸짓에 이르면, 만남을 간직하려는 마음의 절실함이 전해집니다. 찾던 사람이 여기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 됩니다.
그렇게 만났다고 서로의 앞날을 모두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도 나도 시간 속에서 변화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소중한 관계일수록 오래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그 바람만으로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만남의 기쁨 앞에서도 주저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금 함께하는 시간까지 불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을 수 있는 우리는 어떻게 만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까?
붙드는 몸짓 뒤에 사랑을 흔들거나 깨우지 말라는 후렴이 놓입니다. 사랑을 인위적으로 앞당기지 말고 그때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찾아 만나 붙드는 장면 뒤에서 들으면, 이미 함께하는 연인들의 사랑을 방해하지 말라는 청으로도 다가옵니다. 이 문맥에서는 그들이 함께하는 시간을 귀히 여기라는 요청에 마음이 머뭅니다. 시는 찾았다는 사실에서 급히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고,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있는 자리를 지켜보게 합니다.[^1]
찾을 때에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가 절실했습니다. 이제는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기쁨의 내용이 됩니다. 만남의 가치를 앞으로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로만 평가하면,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가 오늘의 관계에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오래 함께하기를 바라고 준비하는 일은 소중합니다. 그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눈앞의 사람을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미래의 모든 답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후렴을 지나면 시선이 넓어집니다. 향내를 풍기며 거친 들에서 다가오는 광경, 솔로몬의 가마와 그 둘레의 용사들, 은과 금과 자색 깔개가 차례로 드러납니다. 가마 안에 예루살렘 딸들의 사랑이 엮어져 있다는 노랫말도 들립니다. 이어서 혼인의 날 왕관을 쓴 왕을 보라는 초청이 울립니다. 시는 두 장면이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인지 밝히지 않은 채 혼인의 기쁨으로 우리의 눈길을 이끕니다. 앞서 사랑하는 이를 찾는 목소리를 들었던 독자는 이제 기쁨을 바라보라는 초청 앞에 섭니다.
그 화려한 광경 속에서도 용사들은 칼을 차고 있습니다. 본문은 밤의 두려움 때문에 그들이 무장했다고 말합니다. 경계와 기쁨이 한 광경 안에 놓입니다.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 기쁨을 무효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 배치를 따라가면 인간의 사랑을 조금 다르게 보게 됩니다. 연약함이 남아 있는 삶 안에서도 만남은 기쁨이 될 수 있고, 그 기쁨을 품은 사람에게는 돌봄이 필요합니다.
만남을 기뻐한다고 해서 삶의 불확실성을 잊은 것은 아닙니다. 기쁨에도 나름의 진실이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 그를 다른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마음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 기쁨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아직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지금의 응답까지 거짓이 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앞날을 다 아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은 이 응답을 돌봄의 방향으로 이끕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고, 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신다고 말합니다(엡 5:25, 29). 우리는 그분이 먼저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감당해야 할 책임도 이 먼저 받은 사랑 안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기쁨을 내 힘으로 끝까지 지켜 내야 한다는 부담 앞에서, 우리를 돌보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바라보게 됩니다.
그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서 곁에 있는 이를 바라볼 때, 그가 내게 얼마나 필요한지와 함께 그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생각하게 됩니다. 그 만남을 귀히 여기는 일에는 그 사람의 삶을 살피는 책임도 따릅니다. 함께 있음의 기쁨은 상대도 이 관계 안에서 살아갈 힘을 얻도록 마음을 쓰는 데까지 깊어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양육하고 보호하신다는 말씀이 우리 사랑의 방향을 비춥니다.
그래서 기쁨을 돌보는 일은 구체적입니다. 상대가 지쳤을 때 쉴 수 있도록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 혼자 지고 있는 생활의 무게를 함께 나누는 일에도 사랑의 책임이 있습니다. 함께하는 시간을 더 많이 확보하는 일만큼 그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살피는 일도 중요합니다. 미래를 전부 붙들 수 없어도 지금 상대의 삶에 어떤 짐을 더하거나 덜어 주고 있는지는 돌아볼 수 있습니다.
이 돌봄에는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관계에서 그를 보호하는 일도 포함됩니다. 함께함의 모양을 유지하려고 아픔을 감추거나 견딤을 사랑의 증거로 요구한다면, 양육하고 보호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멀어집니다. 소중히 여김에는 때로 거리를 두고 도움을 받으며 안전을 지키는 일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도 돌봄은 필요합니다. 지금 만남을 기뻐할 수 없는 슬픔을 서둘러 고칠 이유는 없습니다. 아가에 남아 있는 찾는 목소리는 그리워하는 사람의 말을 쉽게 끝내지 못하게 합니다. 누군가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는 자리 곁에, 상실한 이가 충분히 슬퍼할 자리도 있어야 합니다. 그 곁을 지키는 일 역시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돌보는 길입니다.
지금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받아들여도 좋습니다. 그 기쁨을 누리는 일이 앞으로의 모든 날을 장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돌보심 안에서 이 기쁨은 함께하는 이를 귀히 여기는 삶으로 자랍니다. 그 사람도 나와 함께하는 시간을 좋은 것으로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받은 사랑으로 오늘의 만남을 돌보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