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4장은 사랑하는 이의 몸을 오래 노래합니다. 너울 속의 눈과 머리털, 입술과 뺨을 차례로 부르며 비둘기와 염소 떼, 붉은 실과 석류를 곁에 놓습니다. 가슴을 말할 때에는 백합화 가운데 풀을 먹는 어린 사슴이 등장합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을 말하려고 산과 들의 생명이 시 안으로 들어옵니다. 사랑은 몸을 바라보고, 거기서 얻는 기쁨을 아끼지 않고 말합니다.

“나의 사랑 너는 어여쁘고 아무 흠이 없구나”(4:7). 몸의 여러 모습을 부르던 찬사가 한 사람을 향한 말로 모입니다. 잘못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는 도덕적 판정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의 눈에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들려주는 말입니다.[1] 이 찬사에는 몸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는 구체성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말 속에는 그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 그를 가까이 느끼고 싶은 바람도 담깁니다. 아가는 그런 마음을 세밀한 말로 펼쳐 놓습니다. 몸의 기쁨을 말하는 동안 한 사람을 향한 애정도 또렷해집니다.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고 싶은 마음이 깊어지면 그를 잘 안다는 확신도 커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서 기쁨을 얻는 것과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내가 그를 기뻐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그의 마음을 들어야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마음이 그 사람의 뜻까지 대신할 수 있을까요?

시의 찬사는 연인이 건네는 사랑에도 머뭅니다. 함께 가자는 부름에 이어, 그녀의 눈길 한 번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말이 들립니다. 그녀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진하며, 입술과 혀에는 꿀과 젖의 달콤함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던 아름다움에 향기와 맛이 더해집니다. 이 말들을 읽으면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기쁨이 얼마나 많은 감각을 깨우는지 느끼게 됩니다. 그녀의 사랑에 자기 마음이 움직였음을 말하는 이는 이미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의 찬사에도 연인에게서 받은 기쁨이 담겨 있습니다.

이어 사랑하는 이는 동산으로 불립니다. 석류나무와 여러 과수, 온갖 향품이 그 안에 있습니다. 몰약과 침향의 이름을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향기만으로는 다 말할 수 없는 풍성함이 느껴집니다. 눈과 입술을 하나씩 부르던 말이 이제 열매와 향기로 가득한 동산을 펼쳐 보입니다. 한 사람을 기뻐하는 언어가 이렇게 넓어집니다. 상대를 가까이하고 싶은 바람, 서로의 몸을 통해 사랑을 누리는 기쁨이 이 이미지 안에 담겨 있습니다.

그 동산은 잠겨 있고 샘은 봉해져 있습니다. 동시에 열매가 있고 레바논에서부터 물이 흘러오는 동산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귀히 간직된 관계의 이미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그와 나눌 사랑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이 풍성함 안에 함께 있습니다. 이 시에서 사랑의 결속과 사랑을 누리는 기쁨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아무에게나 같은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는 친밀함이 있기에, 서로에게 향하는 사랑은 특별한 뜻을 지닙니다.

이 동산을 향한 찬사 뒤에서 여인의 초청이 들립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4:16). 눈과 입술과 향기를 찬미받던 사람이 자신이 바라는 친밀함을 말합니다. 사랑하는 이를 부르며, 그가 동산의 열매를 누리기를 바랍니다.[2] 그녀를 아름답다고 부르는 말과 그녀가 사랑하는 이를 부르는 말이 한 시 안에서 만납니다. 풍성한 동산이라는 말만으로는 다 들을 수 없었던 그녀의 바람이 그 초청에 담겨 있습니다.

여인의 말을 함께 듣고 나면 앞의 찬사도 더 깊이 읽힙니다. 사랑하는 이는 아름답게 보이는 몸을 지닌 사람이면서, 자신의 바람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기뻐하는 마음도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듣는 데까지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 말은 나의 감탄이 아무리 깊어도 대신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에게서 오는 말에는 내가 미리 정하지 않은 그의 바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 뜻을 알게 되는 일도 사랑의 기쁨에 속합니다. 내가 잘 아는 사람이라는 확신 속에서도 그의 말을 새롭게 들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사랑을 받는 일이 늘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자신이 쏟은 정성을 생각하며 상대가 어떤 말로, 어떤 모습으로 응답해야 할지 미리 정해 둘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상대의 말을 듣고도 내가 기대한 것과 얼마나 같은지부터 가늠하게 됩니다. 그가 실제로 건네는 사랑보다 내가 정해 놓은 모양이 더 중요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잘 안다는 확신이 오히려 지금 그가 하는 말을 충분히 듣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바라는 사랑을 말하고 함께 맺은 약속을 진지하게 여기는 일은 소중합니다. 서로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야 사랑인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대와 책임을 나눌 때에도 상대가 자기 뜻을 말할 자리는 남아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이 그의 말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얻어 낸 뒤에는 만족할 수 있겠지만, 그가 스스로 건네는 사랑을 받는 기쁨은 그와 다릅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을 얼마나 베풀었는지로만 자신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는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로 부르며 하나님을 본받으라고 권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엡 5:1–2).[3]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신 그분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보다 먼저 있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나를 위해 행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그 사랑에 응답할 책임 앞에 섭니다. 나의 선의와 헌신을 내세우던 자리에서 그분께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받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삶은 이 받은 사랑에 응답하며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씀 앞에서 먼저 돌아볼 것은 내가 사랑을 행하는 방식입니다. 내 헌신을 근거로 상대가 자신을 내 뜻에 내어놓아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자기 자신을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상대에게 자신을 내어놓으라고 요구하는 근거로 뒤집는 셈입니다. 내가 한 일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그 요구가 옳아지지는 않습니다. 받은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은 상대에게서 무엇을 받아야 하는지만 헤아리던 마음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비추어 보게 됩니다.

먼저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내가 관계 안에서 서는 자리도 넓혀 줍니다. 나도 다른 이가 건네는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주었는지에만 마음을 두면, 그가 주는 것은 내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좁아지기 쉽습니다. 상대의 사랑을 받을 때에는 그 사람이 나를 향해 준 마음을 고마워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바란 만큼 돌아왔는지를 따지던 마음에서, 그가 자기 마음으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마음으로 옮겨 가는 것입니다. 내가 베푼 사랑의 크기만으로는 그가 건네는 마음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도 자신의 뜻을 가지고 우리의 사랑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으면 내가 건네는 사랑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상대가 좋아하는 것을 새로 알고, 내가 미처 헤아리지 못한 바람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좋은 친밀함이 그에게도 같은 기쁨인지 함께 말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전하면서도 그의 말에 따라 내 생각을 고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미 다 아는 사람으로만 여기지 않을 때, 그의 말은 내가 생각하지 못한 사랑의 방식을 가르쳐 줄 수도 있습니다. 나의 마음을 전하는 일과 그의 마음을 받는 일이 이렇게 함께 이루어집니다.

아가의 동산에는 끝까지 열매와 향기가 남아 있습니다. 그 풍성함을 기뻐하는 말 곁에서 사랑하는 이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사랑하는 이를 기뻐하는 우리도 그가 원하는 것을 자기 말로 들려줄 때, 내 마음만으로는 알 수 없던 사랑을 받습니다. 그 입술을 아름답다고 여기던 마음으로 그 입술이 건네는 말에도 귀를 기울입니다. 그가 자기 목소리로 건네는 사랑이 내게는 새롭게 받은 기쁨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