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잘못을 판단하는 말에는 멈추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고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 밝히는 일은 필요합니다. 반복된 행동을 살펴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길 수 있는지 판단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판단이 한 사람에게는 더 이상 존중받을 이유가 없다는 선언으로 번지면, 우리는 잘못을 밝히다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자리에 앉게 됩니다. 비판이 정확하다는 사실만으로 그 자리까지 허락받은 것은 아닙니다.
이 문제는 거친 표현을 고치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중한 말로도 사람을 무가치하게 취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고통을 호소하거나 부당한 일을 바로잡으려는 말은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할 수 있습니다. 듣기 좋은가를 기준으로 삼으면, 부드러운 멸시는 지나치고 절박한 증언은 문제 삼게 됩니다. 말의 어조에 앞서 물어야 할 것은 우리가 그 말로 무엇을 판단하고 있으며, 어디까지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는가입니다.
야고보서는 찬송하는 바로 그 입을 살핍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야고보서 3:10). 우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말에서는 자신의 믿음을 보고, 타인을 평가하는 말에서는 상대의 문제만 보려 할 때가 있습니다. 상대에게 잘못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 하는 모든 말을 정당하게 만들어 주는 듯 여겨집니다. 야고보는 그 말도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 곁에 놓습니다. 앞절에서 그가 밝힌 이유는 우리가 저주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신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말과 타인에게 하는 말은 그 사람을 지으신 분 안에서 만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상대에게 실은 좋은 점이 많으니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설득하지 않습니다. 숨은 장점이나 선행을 찾아 존중받을 자격을 입증하지도 않습니다. 상대에 대한 호감이 사라진 뒤에도 저주를 멈추게 하는 근거가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죄와 갈등이 있는 현실 속의 사람에게 이 창조의 사실을 적용합니다. 형상이 창조 때의 온전한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이름이었다면, 지금 사람을 저주하는 일을 이 근거로 책망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1:26–28을 이 자리에서 읽으면, 우리가 너무 쉽게 뒤집어 놓는 순서가 보입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땅의 생물을 다스리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먼저 인간의 성과를 살펴본 뒤 형상을 보상으로 주시는 장면은 없습니다. 창조와 복과 위임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사람은 그분에게 생명과 사명을 받습니다. 우리가 남보다 일을 잘하거나 더 올바르게 살아서 사람으로 지음받은 것이 아니듯, 타인도 우리의 평가를 통과해야 비로소 존중받을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 안에서 그분을 드러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그 사명이 무겁다고 해서 수행 능력에 따라 사람으로서의 가치를 매길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다스림은 하나님이 이미 지으시고 좋게 여기신 세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사람과 다른 생물은 모두 그분이 마련하신 먹거리를 받습니다. 인간도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며, 다른 생명의 근원이나 최종 소유자가 아닙니다. 맡은 권한의 범위와 목적을 묻는 기준은 그 세계를 맡기신 분의 뜻입니다. 권한을 받았다는 사실에는 그것으로 무엇을 했는지 하나님께 대답해야 하는 책임이 붙어 있습니다.
이 순서를 따라가면 사람을 평가하는 나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나는 상대가 맡은 일을 얼마나 잘했는지 살필 수 있지만, 그를 지으신 분보다 앞서 그의 존재를 승인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가 크게 실망했다고 해서 하나님과 그 사람 사이의 창조의 관계를 끝낼 수도 없습니다. 그에게 아직 쓸모가 있는지 찾아내야만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을 내 필요에 묶어 놓는 셈입니다. 찬송으로 하나님께 돌렸던 자리를 일상의 평가에서는 자신이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못을 작게 말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확인된 잘못이 크고 되풀이되었다면 책임도 무겁게 물어야 합니다. 야고보 자신이 공동체의 말을 잘못이라고 판단하고 책망합니다. 다만 책임을 물을 근거가 충분하다는 것과 그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 대하여도 된다는 것은 다릅니다. 그를 인간으로 대하면서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고백하는 우리는 그 판단을 내리는 방식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 역시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입니다. 존엄을 말하면서 피해를 덮거나 증언을 멈추게 한다면, 그 고백은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할 이의 삶에서 힘을 잃습니다. 고통을 말하는 사람에게 침착함을 먼저 요구하며 그가 겪은 일을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사실을 밝히고 도움을 구하며 위험한 관계에서 거리를 두는 일은 보장되어야 합니다. 피해를 말하는 행위 자체를 저주로 몰아세우는 것은 야고보가 책망하는 말의 문제를 엉뚱한 사람에게 돌리는 일입니다.
책임을 묻는 과정에서는 맡겼던 역할과 권한을 거두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사과를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신뢰가 돌아오거나 다시 같은 일을 맡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피해를 막을 조치가 마련되었는지, 책임을 실제로 감당하는지 살피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책임을 묻는 목적이 분명할수록 말은 무엇을 중단시키고 누구를 보호하며 어떤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는지를 향하게 됩니다. 모욕은 이 수고를 대신해 주지 못합니다. 누군가를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데 힘을 쏟는 동안 정작 중단시켜야 할 행위와 바꾸어야 할 조건이 흐려질 수도 있습니다.
능력의 어려움은 이러한 가해와 구별해서 살펴야 합니다. 말을 서툴게 하거나 맡은 일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사실만으로 도덕적 잘못이 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 능력과 여건을 확인하고 일을 조정하는 판단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맡기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그 사람의 존재에는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사람을 평가하는 일에 익숙해질수록, 지금 특정한 일을 할 능력을 살피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으로서의 가치까지 심사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말은 내 감정을 표현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듣는 사람들이 한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줍니다. 야고보가 혀를 큰 배를 움직이는 작은 키와 불길을 일으키는 불씨에 견준 것은 말의 힘을 가볍게 볼 수 없게 합니다. 그 결과가 말한 사람의 의도보다 멀리 갈 수 있기에, 내 판단도 사실 앞에서 고쳐질 수 있어야 합니다. 확인한 것과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나누고, 상대에 대한 불쾌함을 사실의 빈자리에 채워 넣지 않는 수고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처음의 평가를 고집하는 것이 단호함은 아닙니다. 판단받는 사람에게만 해명을 요구하고 판단하는 자신은 아무런 질문도 받지 않으려 할 때, 나는 상대의 책임을 말하면서 내 책임에서는 벗어나려 하는 셈입니다.
야고보는 말에 관한 가르침을 시작하면서 가르치는 사람의 더 큰 책임을 말하고, 자신을 포함하여 말에 실수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여러 생물을 길들여 온 인간도 자기 혀를 길들이지 못한다는 진술은 우리의 자신감을 꺾습니다. 그가 혀의 어려움을 말하면서도 찬송과 저주의 모순을 책망한다는 데서, 우리는 무력함을 핑계로 삼을 길도 잃습니다. 내가 옳은 편에 서 있다는 확신이나 성경을 많이 안다는 사실이 내 말을 저절로 옳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분명히 보았다는 사실은 나를 판단 밖에 세워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는 내가 지적한 잘못과 함께, 그것을 말하면서 상대에게 어떤 대우를 허락했는지도 놓입니다. 밝혀야 할 사실을 더욱 정확하게 말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실을 말하는 나 자신도 그분 앞에 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찬송하는 하나님은 내가 평가하는 그 사람을 지으신 분이며, 내가 한 말에 대해서도 대답을 요구하시는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