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3장에서 바울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말한 바로 뒤에, 그리스도 예수 안의 속량으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씁니다(롬 3:23–24). 죄 아래 있는 사람을 향해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합니다. 이 연결은 잘못을 인정하는 일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죄를 깊이 인정하는 일은 어떻게 자신의 잘못을 감추지 않고 책임지는 길이 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을 더럽히는 악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목록에는 악한 생각과 함께 도둑질, 살인, 속임, 비방이 들어 있습니다(막 7:21–23). 마음과 행동은 한 말씀 안에 놓여 있습니다. 마음을 살핀다면서 실제로 한 말을 흐리거나, 행동을 인정하면서 그 행동에 담긴 욕망은 돌아보지 않는다면 죄를 충분히 살피기 어렵습니다. 내면을 본다는 말에는 자신이 행한 일을 더 정확히 보겠다는 책임이 따릅니다. 내가 무엇을 원했는지 생각하는 일은,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했는지 살피는 일과 이어져야 합니다.
이 말씀 앞에는 고르반을 둘러싼 논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드릴 예물이라는 명목으로 부모를 돕지 못하게 하는 전통을 꾸짖으셨습니다(막 7:9–13). 고르반이라는 선언이 부모를 돌볼 책임을 피하는 데 쓰이고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말의 겉모양만으로 그 행위가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말 아래에 남아 있는 의무를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설명을 보태도 부모를 도울 책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죄를 깊이 살피는 눈은 이런 설명과 실제 행위 사이의 거리를 보아야 합니다.
마음에서 악이 나온다는 말씀으로 환경과 상처의 영향을 지워서도 안 됩니다. 예수님이 안과 밖을 대비하시는 직접적인 문맥은 음식과 정결의 문제입니다(막 7:14–23). 누군가의 행위를 살필 때에는 그가 어떤 압력 아래 있었는지, 누구에게 힘이 있었고 어떤 선택이 가능했는지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책임의 정도를 분별하려면 이런 차이를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남의 숨은 동기를 알아냈다고 단정하는 것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고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의 보편적인 죄 진단도 책임의 주체를 흐리는 말로 읽혀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이 모두 죄 아래 있으며,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게 된다고 말합니다(롬 3:9–20). 종교적 배경이나 다른 사람과의 비교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의롭게 세워 주지는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이 내 의로움을 보증하지 않으며, 죄를 판단할 줄 안다는 사실도 나를 그 판단 밖에 두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 사건의 책임까지 모든 사람에게 같게 나뉘지는 않습니다. 누가 어떤 행동을 했고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는 여전히 밝혀야 합니다. 피해자도 죄인이라는 말은 그가 당한 해악의 책임을 나누어 지우는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라는 고백 뒤에도 그 말을 한 사람, 그 행동을 한 사람은 남습니다. 보편적인 고백이 정직하려면 자신이 행한 일을 인간 일반의 연약함 속으로 흩어 놓지 않아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고백할 때에는 구체적으로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무엇을 왜곡했는지, 어떤 책임을 피했는지 말하지 않은 채 사람이란 원래 부족하다는 설명으로 돌아가면, 고백은 내 행위에 닿기 전에 멈춥니다. 죄의 깊이는 더 강한 자책의 말로만 드러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유리하게 설명하려고 내 행위에 붙였던 이름을 거두고, 실제로 한 일을 인정하는 데서 드러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옳다고 주장할 근거를 내려놓은 사람은 무엇을 의지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까요.
바울의 답은 죄인의 정직함보다 먼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향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의 속량을 통해 은혜로 의롭다 하십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말합니다(롬 3:21–24). 믿는 사람은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자리를 마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것을 의지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함께 말합니다(롬 3:25–26).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 은혜를 잘못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는 호의로 읽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신다는 말씀은 내가 실제로 한 행동이 무해했다는 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죄인을 받아들이시는 근거가 그리스도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의지하는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작게 만들어야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의 사실을 인정하는 일과 구원의 근거를 잃는 일을 하나로 묶지 않도록, 복음은 하나님 앞에 설 자리를 다시 보게 합니다.
이 복음에 기대어 자기변명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변명은 사실을 정확히 설명하거나 부당한 비난에서 자신을 지키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 잘못을 축소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여 자기 의로움을 확보하려는 말입니다. 자신을 의롭게 만드는 일을 그런 말에 맡겨 두면, 무엇이 사실인지보다 어떤 설명이 자신에게 유리한지가 앞서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은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는 설명의 성공에 하나님 앞의 소망을 걸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나를 지키는 데 유리한 설명을 고르는 일을 멈추고, 실제로 무슨 일을 했는지 살피도록 부름받습니다.
정직한 고백 자체도 의로움의 새로운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얼마나 철저하게 자신을 비판했는지, 얼마나 깊이 괴로워했는지를 내놓으며 받아 달라고 요구한다면, 고백 속에서도 내 자격을 마련하려는 일은 계속됩니다. 은혜를 받기 전에 충분히 진솔한 사람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자비가 잘못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보상이라면, 값없이 주신다는 말은 설 자리를 잃습니다. 고백은 그 자비를 의지하여 자신이 행한 잘못을 사실대로 인정하는 응답입니다. 그 말의 깊이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대가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믿으면서도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여전히 두려울 수 있습니다. 책임을 인정한 뒤 무엇을 잃게 될지 걱정이 남을 수 있고,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일에는 지속적인 수고가 필요합니다. 의롭다 하심은 우리의 행동이 이미 모두 달라졌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다만 두려움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고백을 무효로 만들지는 않으며, 그 두려움이 내가 한 일을 다른 사람의 책임으로 바꾸어 주지도 않습니다. 그 두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 응답은 내 고백이 얼마나 좋게 받아들여졌는지 확인하는 데 머물 수 없습니다. 책임은 내가 마음의 안정을 얻었는지와 별개로, 내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 남긴 일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을 왜곡했다면 그 말이 전해진 자리에서 바로잡을 일이 있고, 해를 끼치는 행동이 이어지고 있다면 멈출 일이 있습니다. 내가 의도한 것만 설명하기보다 실제로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들을 필요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나를 다시 좋은 사람으로 평가해 달라고 청구할 공로가 되지 않습니다. 사과를 받았다고 해서 상대에게 곧바로 용서하거나 신뢰를 돌려줄 의무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에게는 내 마음을 안심시켜 줄 책임이 없습니다.
고백하는 말이 끝난 뒤에도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남긴 일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받아 주실 근거를 그리스도께 두면서, 이웃 앞에서는 내가 한 일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옳게 보이게 할 말을 찾던 관심을, 그에게 남긴 일과 내가 감당할 몫으로 옮겨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