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대하라고 요청합니다(몬 1:16). 오네시모를 설명하던 종이라는 말 곁에 형제라는 말이 놓입니다. 두 말을 나란히 적는 것으로 요청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형제라고 부를 사람을 이제 어떻게 맞을 것인가가 남습니다.
오네시모의 잠시 떠남을 영원히 함께할 관계의 가능성에서 바라보면서 바울은 “아마”라고 말합니다(15절). 그 떠남에 담긴 뜻을 단정하지 않으면서도, 앞으로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이미 특별한 형제입니다. 빌레몬의 호의를 얻어야 비로소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이 형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그 관계에 맞게 받아 달라고 청합니다. 이 편지가 부탁에 앞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한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합니다(3절). 빌레몬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확인한 뒤 건네는 인사가 아닙니다. 바울은 주님의 은혜 안에 있는 이들에게 그 관계에 합당한 응답을 구합니다. 누군가를 귀하게 대하는 일이 은혜를 얻기 위한 자격 시험이 되면, 우리는 사람을 만나면서도 자신이 얼마나 좋은 신자인지 입증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 은혜 안에서 맺어진 관계는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까지 이어집니다. 바울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육신과 주 안에서 관계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편지에 법적 해방을 명시한 명령은 없지만, 그 침묵이 사람을 소유하고 종으로 취급하는 일을 승인하지는 않습니다. 형제됨을 마음속 우애에만 가두면 그 사람이 매일 받는 대우는 신앙의 바깥에 남습니다. 바울의 요청은 빌레몬과 오네시모가 맺은 실제 관계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 대우의 기준을 밝히는 말이 이어집니다.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17절).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을 동역자로 여기는 관계를 오네시모의 영접에 연결합니다. 바울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오네시모 앞에서는 작동하지 않아도 되는지 묻는 셈입니다. 바울과 함께 믿고 일하는 관계를 인정하면서, 그가 형제로 사랑하는 사람을 낮추어 대하는 일은 서로 어긋납니다.
고대의 노예 관계를 오늘의 교회 봉사에 그대로 겹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신앙으로 맺어진 관계가 실제 대우에 미치는지는 우리도 살필 수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맡은 일이 줄어들거나 당장 보탤 것이 없을 때에도 그 사람의 이야기를 같은 무게로 듣는지, 그의 사정이 우리의 결정을 바꿀 이유가 되는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필요한 일을 맡길 때만 가까이 부르고 그 일을 할 수 없을 때에는 관심이 멀어진다면, 그 관계를 지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드러납니다.
바울도 오네시모가 유익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그가 곁에서 섬기기를 바랐습니다(11–13절). 사람이 공동체에 보태는 일을 소중히 여기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아들이며 형제로 받아들인 사람을 유익이라는 한 단어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맡길 일이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서 맡길 일만 보아도 된다는 허락은 아닙니다.
형제로 맞는 일에는 현실의 부담도 따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영접의 부탁에 이어 채무 문제를 꺼냅니다.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18절). 빚이 있다면 누가 그것을 감당할 것인지가 영접의 요청과 함께 다루어집니다. 형제라는 말만으로 미해결 문제가 사라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상대를 받아들이는 일과 남은 책임을 살피는 일이 한 편지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갚겠다는 뜻을 친필로 밝힙니다(19절). 그의 이름은 부탁하는 사람의 이름이면서, 그 부탁에 따를 수 있는 부담을 맡겠다는 사람의 이름이 됩니다. 그는 빌레몬의 선의만 요청하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영접에 걸릴 수 있는 문제를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두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대목에서 형제 관계를 생각하는 우리의 시선도 달라집니다. 상대가 얼마나 너그러워질 수 있는지 살피던 시선이, 그 관계를 청하는 자신이 무엇을 책임질 것인지로 향합니다.
이 부탁은 빌레몬이 이미 베풀어 온 사랑에 기대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빌레몬을 통해 평안함을 얻은 일을 감사했고(7절), 이제는 자신의 마음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20절). 오네시모를 맞는 일이 바울과 빌레몬 사이의 기쁨과도 연결됩니다.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문제가 그 사람에게만 맡겨진 채 남지 않는 것입니다. 그를 두고 관계를 맺은 이들이 함께 응답해야 할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평안은 불편한 일을 말하지 않아 얻는 고요함과 다릅니다. 편지는 채무를 말하고, 대우의 기준을 바꾸며, 부탁하는 사람의 책임도 드러냅니다.
교회에서도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맞을 때의 태도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시간을 내고, 함께할 자리를 마련하며, 형편을 먼저 살피는 배려를 누구에게까지 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맡은 직분이나 보탤 수 있는 몫이 적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늘 나중에 생각해 왔다면, 그를 형제로 맞는 일은 그 순서를 바꾸는 데까지 이어집니다.
함께하려면 이동을 돕거나 돌봄의 시간을 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이 있다면 공동체가 어떤 몫을 맡을 수 있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영접을 청한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몫을 내놓고, 공동체는 그 한 사람의 수고에 모든 일을 맡겨 두지 않아야 합니다. 받아들이자는 말에 따르는 시간과 비용을 누구도 자기 일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 어려움은 결국 맞아들일 사람의 몫으로 남습니다.
그런데 19절 후반의 말은 쉽게 지나가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빌레몬 자신도 자신에게 빚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환기합니다. 신앙으로 맺어진 관계의 무게를 불러오는 말입니다. 앞서 빌레몬의 승낙을 중요하게 여긴 바울의 태도와 함께 읽으면, 사랑의 호소에도 상대를 움직이는 강한 힘이 실릴 수 있음을 보게 됩니다. 사랑으로 말한다는 선언만으로 요청하는 사람의 권위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자기 말보다 더 행하리라고 기대한 내용도 편지 안에서 구체적으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21절).
믿음의 길에서 누군가에게 받은 도움은 귀합니다. 그렇다고 그 고마움이 이후의 모든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하는 빚이 된다면, 형제라는 말은 다시 사람을 묶는 말이 됩니다. 도움을 준 사람도 같은 주의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을 놓친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믿음을 돌볼 수 있지만 그 믿음의 주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감사해야 한다는 이유로 자기 형편을 말하지 못하게 하거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요청의 크기를 끝없이 늘린다면 서로를 형제로 대하는 관계는 좁아집니다.
영접을 받는 사람에게도 어떤 도움을 원하고 어떤 관계를 이어 갈지 말할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관계를 이어 가자는 말이 상처 입은 사람에게 다시 위험을 감수하게 하거나 남은 손실까지 떠넘기는 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의 안전과 권리를 지키며 그가 동의하는 방식으로 함께하는 것이 형제를 존중하는 영접입니다.
편지 끝에서 바울은 자신을 위한 숙소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고, 공동체의 기도로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22절).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요청했던 바울도 그들의 기도와 환대를 필요로 합니다. 이어 동역자들의 문안을 전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공동체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3–25절). 편지는 빌레몬의 대답이나 완성된 화해를 전하는 대신, 이 요청을 은혜의 기원 안에 남깁니다.
이 마지막 은혜는 모든 관계를 잘 정리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 아닙니다.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과 응답을 요청받은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입니다. 우리도 그 은혜에 기대어 사람을 맞는 기준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귀하게 여기는 이를 대하듯 낮춰 보던 사람을 맞고, 그를 맞는 데 필요한 수고를 함께 맡는 것입니다. 형제라고 부르는 말은 그렇게 그 사람이 받는 대우와 우리가 책임질 몫을 바꾸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