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의 죄를 고발하는 문장은 짧습니다. “모든 사로잡은 자를 끌어 에돔에 넘겼음이라”(6절). 힘을 가진 쪽이 붙잡힌 사람들을 끌고 가 다른 이의 손에 넘겼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처분에 맡겨졌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행위를 벌의 이유로 지목하십니다. 사람을 붙잡을 힘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을 처분할 권리까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다메섹을 향한 말씀도 사람이 당한 일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철 타작기로 타작하듯 길르앗을 압박했습니다. 타작의 도구로 빗댈 만큼 그 폭력은 잔혹했습니다. 다메섹의 잔혹함과 가사의 포로 거래는 서로 다른 행위이지만, 힘을 가진 자가 다른 사람의 삶을 함부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함께 심판받습니다. 두 나라를 향해 되풀이되는 서너 가지 죄라는 말은, 이 심판이 쌓여 온 악을 향한 것임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물으시는 것은 그 힘으로 사람에게 무엇을 했느냐는 것입니다. 이 물음 앞에서 하나님을 믿는 공동체도 예외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포로들의 국적은 이 대목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구의 편인지를 알아야만 가사의 죄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붙잡혀 넘겨진 사람이 우리와 가까운지, 우리 공동체에 속하는지에 따라 그 행위의 무게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본문은 사람을 다루는 힘을 판단하는 자리에 우리를 세웁니다. 그 자리에 서면 자기편의 유익을 앞세우는 판단이 정당한지도 물어야 합니다.

드고아의 목자 아모스가 전하는 것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입니다. 그는 시온에서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 소리를 내시는 하나님을 전합니다. 그 음성 앞에서 목자의 초장과 갈멜산 꼭대기까지 마르리라고 말합니다(2절). 삶을 지탱하던 곳도 그 말씀 앞에서 흔들립니다. 하나님을 부르는 일이 언제나 우리가 가진 것을 안전하게 지켜 준다는 뜻일 수는 없습니다.

심판의 불은 궁궐에 이르고, 다메섹의 빗장은 꺾입니다. 통치자들이 끊어지고 아람 백성은 사로잡혀 기르에 이릅니다. 가사를 향한 선언도 블레셋의 남아 있는 자들에게까지 닿습니다(4–8절). 몇 사람의 잘못을 꾸짖는 정도로 줄일 수 없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사람을 짓밟던 힘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을 지키지 못합니다. 궁궐과 방어가 견고하다는 사실은 그 힘이 옳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습니다.

이 심판을 읽으며 남을 응징할 권리를 우리 손에 쥐려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의 진행은 그 손부터 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나온 예루살렘도 심판의 불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어지는 2장에서 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한 일로 심판받고, 이스라엘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가난한 자를 판 일로 고발됩니다(암 2:4–6). 다른 나라가 사람을 넘긴 일을 심판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거래도 물으십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예배의 자리와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전당 잡은 옷을 제단 곁에 펴고 누우며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신전에서 마십니다(암 2:7–8).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름 아래 사람에게 한 일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자기 힘을 더는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보증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방식도 내놓아야 합니다.

만일 피해를 말하는 일이 공동체를 해치는 일로 취급된다면, 살펴야 할 대상이 바뀝니다. 사람에게 한 일을 따져야 할 자리에 그 사람의 충성심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는지부터 증명하라고 요구할수록, 피해를 낳은 결정은 검토를 피하기 쉽습니다. 아모스의 말씀을 듣는 공동체는 자기 이름을 지키기에 앞서 자신이 한 일에 답해야 합니다.

여기서 공동체를 위한 희생은 필요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생깁니다. 함께하는 일에는 수고와 양보가 필요합니다. 모두가 자기 몫의 부담을 피한다면 공동의 일은 이루어지기 어렵습니다. 서로 책임을 약속한 계약이나 자발적인 헌신을 고대의 포로 거래와 같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아모스의 말씀을 모든 요구가 폭력이라는 주장으로 넓히면, 본문이 고발하는 가해의 구체성도 흐려집니다.

그러나 헌신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누군가의 피해를 감수해도 된다는 판단으로 곧장 건너갈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가 얻을 유익이 크다는 이유로 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해를 작게 셈할 때, 그 사람의 삶은 이미 다른 이의 목적에 종속됩니다. 그 피해를 전체 성과 속에 합쳐 버리면, 무엇을 이루었는지는 남아도 누가 그 대가를 치렀는지는 가려집니다. 필요한 일을 맡기는 것과 피해를 말할 길까지 막으며 감당하도록 몰아붙이는 것은 다릅니다. 힘의 책임은 좋은 목표를 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는 동안 누구에게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까지 살펴야 합니다.

마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힘을 사용하는 방식을 가르치시는 상대는 제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자신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말씀하십니다. 그 뒤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영광 가운데 좌우에 앉기를 구하고, 다른 제자들은 그들을 향해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이방 집권자들이 사람들을 임의로 주관하며 권세를 부리는 방식을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막 10:32–44). 그분은 크고자 하는 이에게는 제자들을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이에게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가르치시며 자신이 오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그분이 구원을 위해 내어주시는 것은 자신의 목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구원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그분의 섬김을 받는 공동체라면,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있는지도 그분 앞에서 다시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헌신적인 지도자의 모범 정도로 줄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그분의 행동이 먼저 있고, 우리의 섬김은 거기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기 내어주심을 피해 입은 사람에게 먼저 들이대어 더 참으라고 요구한다면, 우리는 그 섬김을 권력을 지키는 도구로 뒤집게 됩니다. 예수께서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에서 다른 사람의 삶을 더 내놓게 할 권리가 나오지는 않습니다.

자기 공동체를 돌아보는 일은 책임을 흐리는 일이어서도 안 됩니다. 누가 결정했고, 누가 그 결정의 유익을 얻었으며, 누가 피해를 입었는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공동체 전체가 돌아보아야 한다는 말로 힘을 행사한 사람의 책임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이 용서하거나 조용히 견뎌 주어야만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책임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앞서, 우리가 그에게 무슨 일을 했느냐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에게 수고를 요청할 수 있는 자리에는, 그 요청이 사람을 해칠 때 거둘 책임도 함께 있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방식이 드러났다면 그것을 멈추는 일에는 실제 부담이 따를 수 있습니다. 공동체의 계획이 어긋나고 기대한 성과를 내려놓아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손실이 아깝다는 이유로 이미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다시 감당을 요구한다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힘을 행사한 쪽은 자신의 결정을 고치고 그 결과를 맡아야 합니다. 공동체도 그 책임을 밝히고 피해가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을 함께 맡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넘긴 가사의 궁궐에 불을 보내겠다고 하십니다. 궁궐이 남아 있다는 것으로 그 나라의 행위가 옳았다고 말할 수 없듯, 공동체가 계속된다는 사실만으로 그 방식이 옳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지키려는 이름과 일의 크기 앞에서 사람에게 한 일이 작아지지 않습니다. 자기 목숨을 내어주시는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에는, 누군가를 해치면서까지 자신을 지킬 권리가 없습니다. 그 사람에게 더 견디라고 말하기 전에, 사람을 해치던 요구를 거두고 그 요구가 남긴 피해를 책임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