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의 고발에는 형제라는 말과 칼이라는 말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가까운 관계를 가리키는 말 곁에, 그 관계를 훼손하는 행동이 나옵니다. 형제라는 이름만으로는 그 사이에서 벌어진 일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어떤 관계였는지와 함께, 그 관계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물으십니다.
두로는 사로잡힌 사람들을 에돔에 넘겼습니다. 아모스 1장 9절은 이 행위를 고발하면서 두로가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계약의 상대가 누구였는지, 넘겨진 사람들이 모두 어느 민족이었는지를 이 구절만으로 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계약이 요구한 책임을 저버린 채 사람을 넘겼다는 고발은 분명합니다. 기억하지 않았다는 말은 지나간 약속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는 뜻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지켜야 할 관계의 의무가 실제 행동에서 버려졌습니다.
에돔에게는 칼로 형제를 뒤쫓고 긍휼을 버린 책임이 돌아옵니다. 계속되는 분노도 그 폭력과 함께 고발됩니다. 이 대목에서 분노만 떼어 내면 본문은 오래 화내지 말라는 교훈으로 좁아집니다. 그러나 에돔의 분노에는 상대를 해치는 행동이 붙어 있습니다. 칼로 형제를 쫓는 행동 곁에서 긍휼은 버려지고 적대는 지속되었습니다. 관계가 가깝다는 사실은 그 칼의 책임을 가볍게 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상처 입은 사람에게 먼저 마음을 풀라고 요구한다면, 고발이 향한 자리를 바꾸게 됩니다. 형제라는 말은 칼을 든 쪽의 책임을 무겁게 합니다. 상대가 형제이니 더 오래 견뎌야 한다는 요구를 피해자에게 덧붙일 근거는 여기에 없습니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해치지 않을 책임을 물어야 할 자리가 분명해집니다.
암몬의 고발에서는 목적이 직접 드러납니다. 자기 영토를 넓히기 위해 길르앗의 임신한 여성들을 잔혹하게 해쳤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의 숨은 마음을 더 추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본문이 밝힌 목적과 행위만으로도 충분히 무겁습니다. 넓히려 한 땅과 그 과정에서 훼손한 생명이 함께 놓입니다.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계획은 그 계획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의 몸 앞에서 판단을 받습니다.
공동의 목적을 이루려면 수고와 양보가 필요합니다. 함께 정한 일을 위해 자기 몫을 내어놓는 헌신도 귀합니다. 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자발적으로 감당한 수고와 힘에 밀려 떠안은 위험은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얻을 결과만 설명해서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했고,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감당하게 되는지까지 보아야 합니다. 암몬의 영토 확대를 향한 고발은 모든 성장을 죄라고 선언하지 않으면서도, 목적을 이루는 수단과 그 수단이 낳은 피해를 끝까지 묻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고는 사람을 해치는 힘을 행사한 공동체의 성과 궁궐에도 닿습니다. 두로와 에돔에 불이 선고되고, 암몬의 왕과 지도자들에게는 포로로 끌려갈 일이 예고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흔든 힘이 자신을 지켜 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궁궐의 견고함이 그 안에서 행사한 권력을 옳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삶을 그 힘의 크기보다 가볍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그 엄중한 선고를 읽는 사람이 곧 심판을 집행할 권리를 얻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믿는다는 말로 자기 보복을 거룩하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힘이 옳고 그름을 결정하지 못한다는 경고는, 그 말씀을 읽는 우리의 힘에도 적용됩니다.
그런데 다음 장에서 이 판단은 한 번 더 깊어집니다. 아모스 2장 1절은 모압이 에돔 왕의 뼈를 불살라 재로 만든 일을 고발합니다. 앞에서는 형제를 추격한 에돔이 심판의 대상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에돔 왕에게 가해진 훼손이 죄로 지목됩니다. 에돔의 가해가 지워진 것도 아니고, 에돔이라는 이름 때문에 그에게 가해진 악이 정당해진 것도 아닙니다.
이 대목은 악을 비판하는 우리의 판단을 멈추어 세웁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정확히 밝히는 일과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일 사이에는 큰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의 폭력을 고발하셨다고 해서 에돔의 모든 고통을 반길 권리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가해를 분명하게 묻는 일에는 그 사람이나 집단의 다른 피해까지 부정하지 않을 정확함도 필요합니다. 이것은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이해하거나 다시 만나라고 요구하는 말이 아닙니다. 악에 대한 고발을 또 다른 악의 허가로 쓰지 않으려는 판단입니다.
그 판단 앞에는 이스라엘도 섭니다. 이웃 나라들을 향하던 고발은 유다를 거쳐 이스라엘의 행위에 이릅니다. 은을 받고 사람을 팔고, 가난한 사람을 작은 대가에 넘기며, 약한 사람의 길을 막는 일이 그 안에도 있었습니다. 제단 곁에서 누리는 풍요에도 다른 사람에게서 거둔 담보와 벌금이 들어 있습니다. 예배하는 공동체라는 사실이 그 물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묻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른 나라의 행위를 듣던 백성이 이제 자기 손이 한 일을 듣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고발하시면서 먼저 베푸신 구원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고 광야에서 인도하셨으며, 선지자와 나실인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선물을 받은 뒤에 사람을 팔고 하나님의 말씀을 막았습니다. 구원의 기억과 현재의 행위가 서로 어긋납니다. 해방을 받았다는 기억이 남을 억누르는 일의 보호막이 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행동이, 그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묻는 근거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교회도 이 물음을 다른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남겨 둘 수 없습니다. 구원이 우리에게서 시작되지 않았다는 고백은 우리 공동체가 하는 일을 모두 옳다고 선언할 권한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생명으로 살면서 다른 사람의 삶을 우리의 목적에 종속시킬 수는 없습니다. 책임 있는 행동으로 구원받을 자격을 증명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먼저 받은 구원이 있기에, 그것을 고백하는 입과 사람을 대하는 손이 어긋난 자리를 외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말로 책임을 똑같이 나누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모든 공동체가 하나님의 판단을 듣는다는 사실은 모든 당사자가 같은 잘못을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칼로 쫓는 행동과 위험을 피해 물러나는 행동은 다릅니다. 피해자가 분노한다는 이유만으로 그에게도 같은 책임을 물으면, 에돔을 향했던 고발은 다시 피해자의 어깨에 얹힙니다. 자기 성찰은 누가 무엇을 했는지 더 분명하게 보는 일이어야 합니다.
피해가 확인되었다면 공동체는 그 일을 말한 사람에게 관계를 깨뜨렸다는 책임을 넘길 수 없습니다. 관계를 이어 가는 데 필요한 수고를 피해자 한 사람에게 몰아주면서 화해를 말할 수도 없습니다. 가해행위를 멈추게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일, 당사자가 보복의 두려움 없이 자기 처지를 말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공동체가 감당할 몫입니다. 교회의 이름과 성과를 지킨다는 이유로 당사자의 안전을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믿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고통에 끝날 날짜를 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모스는 피해자의 상처가 언제 아물었는지, 그들이 누구와 다시 관계를 맺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을 판단하신다는 믿음으로도 누군가에게 용서와 복귀를 서두르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책임을 피해자의 용서가 먼저 와야 하는 일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형제라는 이름은 이제 그 관계를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돌아옵니다. 그 이름으로 상대에게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는지보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멈추고 어떤 책임을 맡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 생명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이 안전해지기 위해 공동체의 체면까지 책임져야 해서는 안 됩니다. 가까운 관계의 무게는 그 사람을 붙들어 두는 힘이 아니라, 그에게 떠넘겼던 짐을 자기 자리로 가져오는 책임에서 드러납니다.